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평가 (문단 편집) === 우수한 기록 문화 === 기록 문화 역시 세계적 수준이었다. 세계적으로 드물게 국가 주도로 방대한 역사 기록은 물론이고 및 왕실과 조정을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세한 기록 수준 및 [[사관(역사)|사관]]들의 전문성과 프로 정신은 익히 알려져있을 정도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수준을 보여주는 사례로, 태종이 말을 타다가 떨어진 날 태종은 부끄러워 "사관에게는 알리지 말라."라고 하였으나 사관은 그것을 '말을 타다가 떨어지셨는데 주위를 둘러보시더니 사관에게는 알리지 마라고 하셨다'라고 그대로 받아적은 적이 있다. 다만 이는 조선 전기에 한정되며, 조선 후기인 영-정조대에는 왕이 적지 말라고 하면 그냥 안 적었고, 일부 기록은 없애라 하면 없앨 수도 있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의 예시로 [[정조(조선)|정조]]에 의해 승정원일기의 [[임오화변]]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 것이 대표적이다. 덕분에 이 사건은 일종의 미제 사건이자 조선 최대의 논쟁거리 중 하나로 남았는데, [[임오화변|항목]] 참조.], 승정원 일기에 적힌 내용도 조금씩 수정 및 조작이 이루어졌다. 단, 사관들도 직접적으로 쓰지 못할지언정 우회적으로라도 어떻게든 기록을 남기고자 노력했다. 예를 들어, "역적 OOO가 한 말을 쓰지 마렷다!" 라고 왕이 명하면 말은 쓰지 않되 그 OOO와 비슷한 말을 한 자인 XXX가 기록되어 있으면 "역적 OOO가 한 말은 역적 XXX가 한 말과 비슷한 말이었다," 라는 식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기록이 너무 넘쳐나다보니 왕조에 대한 환상을 가질 여지도 없고 반대로 비참한 부분은 매우 세세하게 적혀있다보니 조선이 괜히 더 비난받는 면도 없지 않다. 기록에 대한 문인 계층의 관심과 욕구도 높았다. 영조, 정조 대에 이념 및 외교적인 이유는 청나라로부터의 서적 반입을 금지했음에도 청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사신으로 오가면서 당시 북경의 서점가에 있는 책들을 쓸어담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유입된 청과 서양의 서적들은 [[실학]]으로 대표되는 정조 시대의 학문적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다만 이러한 풍부한 기록은 전적으로 수도와 왕실 중심의 정치적 사건에 편중되어 있다는 단점이 있다. 조선의 향촌, 지방사는 그 기록이 매우 적은 편이기 때문에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