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평가 (문단 편집) === 정교한 관료제 === [[관료제]] 또한 매우 근대적인 체계였는데, 서구권은 아예 근세까지 매관매직과 엽관주의, 족벌주의 외에는 관료 등용 제도가 없었다. 서구의 경우 차라리 매관매직이 그나마 유능한 관료를 뽑는 제도였을 정도.[* 서구의 경우, 매관매직조차 비교적 가까운 시대인 중세 말~근세의 산물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사적 인간관계 속에서 확인 가능한 범위 내에서 능력이나 혈통(신분)으로 인재를 뽑았다. 때문에 이 시대 인물 생애들 살펴보면 부모 빽이나, 교수 추천서나, 높으신 분들 인맥과 추천이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 귀족들이 명성에 집착하는 것도 그 관계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혈통이나 매관으로 뽑는 것은 의외로 능력과 상관 관계가 있기는 했다. 생각해보라. 기사나 관료를 뽑으려고 하는데, 재산도 충분하고 상류층 사회에 연줄도 있어서 이들 사이에서 돌아가는 교육/양성체계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 중 쓸 만한 사람이 많을까, 아니면 평생 사무나 무술을 접하지 못하고 땅을 일구면서 살아가는 농민의 자식 중에서 쓸 만한 사람이 많을까?][* 영국군이 [[매관매직]]으로 인해 [[크림 전쟁]] 때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개박살이 난 이후에야 매관매직이 사라졌을 정도로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매관매직이 합법적인 전통이었다. 애당초 [[과거 제도]] 같은 시험을 통해 관료나 군인들을 선발한다는 개념 조차 없었을 정도였다. 근세 프랑스에서는 주로 재정수입의 증대라는 관점에서 관직매매(vénalité)가 성행하였다.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는 1604년 관직보유자가 관직가치의 60분의 1에 해당하는 관직세를 매년 납부할 경우 관직의 세습을 인정하는 폴레트(Paulette)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 폴레트 제도는 왕의 명령을 받는 중앙 상비 관료 외에 지방관, 판사와 온갖 말단 관직에까지 확대되었으며, 이 제도의 전성기인 루이 14세 때에는 얼마나 뜯었는지 전체 세수의 30% 넘게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의 악명높은 징세청부업자도 돈이 오가는 공개입찰을 통해 징수자로 선정되었다. 원칙적으로 평민도 관직 또는 영지를 구입하면 그에 딸린 작위까지 얻어서 귀족이 될 수 있었는데, 귀족이 잘 안 팔았다(...)] 한편 조선은 이미 근대적인 실력주의 관료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동시대 유럽에서 시험으로 관료들을 선발한다는 개념이 아예 없던 시절[* 유럽에서 지방 말단 관료는 공식적으로 돈주고 자리를 살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유명한 공식적 [[매관매직]] 제도는 근세 유럽의 군 특히 육군 전투병과의 임관 및 진급 제도로 임관 진급하기 위해서는 일정 근속 년수를 채운 뒤 돈으로 계급을 샀다. 원래는 정부의 지원 부족을 육군 장교들이 자기 돈으로 해결하던 게 공식적인 제도가 됐던 것이다. 특히 영국 육군의 사례가 유명한데, 얘네들은 [[크림전쟁]] 때까지도 이 시스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발라클라바 전투]]로 대표되는 크림전쟁에서의 영국 육군 기병대의 삽질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거였다.] 당대 조선은 이미 [[과거 제도]]를 통해 관료들을 선발하고 있었는데 고려시대 때 처음 시행된 과거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고려시대 때의 문제점들을 대폭 개선, 지역균형과 능력주의가 매우 절묘하게 섞인 합리적인 제도로 발전했다. 소과에서 각 도별로 할당된 인원을 먼저 뽑은 뒤 대과에서 점수로 줄을 세워서 최종 합격자를 가렸다.[* 배치, 승진 등 실제 공직생활도 대과 성적, 근무 성적이 크게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임용 이후에도 실력주의에 입각해 관료제를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https://s-space.snu.ac.kr/handle/10371/143455|조선의 인사임용제도와 영향요인에 관한 연구 - 유교적 실적주의를 중심으로 -]]] 물론 그 만큼 난이도와 경쟁률은 상상을 초월했는데 전국에서 모인 수만 명의 응시자 중에서 소과 복시(최종)에서 200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쳐내며 그 200명 중 단 33명만을 대과 복시에서 뽑았다. [[명나라]]는 더 심했는데 수십만 명 중에서 뽑힌 사람이 고작 400명이었으니 조선이 경쟁률에서 낫긴 했지만... --거기다 '논술형'이었다..-- 또한 시험 단계도 어마어마하게 빡빡해서 진사시/생원시, 즉 소과를 통과해야만 대과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당장 생원/진사시를 통과해 생원이나 진사 타이틀을 따면 그 아래로 4대가 양반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 수준이었으니 생원/진사시의 난이도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일반 양인의 경우에도, 과거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통념과 다르게 조선대의 평민 출신 '''문과''' 급제자 비율은 초기 40% ~ 50%였으며, 이런 초기 과거 급제자 출신들이 문벌을 짓기 시작한 중기에는 점차 낮아져 10% 후반대까지 이르렀으나, 양란 이후 다시 비율을 회복해 후기에는 다시 40% ~ 50% 비율을 유지했으며, 말기에는 60%에 육박했다는 최근 연구 결과도 있다.[* 조선사 전체로 확대하면 평민 급제자 수는 전 과거 급제자 중 1/3에 이른다.]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 연구) [[https://blog.naver.com/marich77/40201245403|출처]] [[http://news.donga.com/List/3/10/20130122/52512357/1?|기사1]] [[http://www.hankookilbo.com/v/9cda8a100f62479088857e71124c5f50|기사2]] 이 처럼 과거제는 신분과 계급에 상관없이 실력으로 관료들을 선발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유럽 같은 다른 국가들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실력주의에 바탕을 둔 객관적이고 평등한 관료선발 제도였다. 서양에서는 보통 '''근대국가'''의 탄생에 대해 얘기를 할 때, 근대국가는 '''중앙집권'''을 했고, '''[[관료주의]]'''이며, '''성과중심주의'''였으며, 또한 '''영토 전체를 꿰뚫어서 효율적으로 통치했다'''고 주로 설명하는데 조선은 이 기준에 맞춰볼 때 '''근대국가에 훨씬 더 가까운 모습'''으로 당대 조선의 정부에는 수많은 행정 부처들(인사처([[이조(조선)|이조]]), 국방부([[병조]]), 세무부([[호조(조선)|호조]]), 외교부([[예조]]) 등등)이 있었고 또한 과거 같은 시험으로 선발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자문위원들이 있었으며, 실제로 이런 중앙집권 체계는 꽤 복잡한 방식으로 잘 운영되었다. 각 지방들 역시 중앙정부로 부터 직접적으로 통치되었는데 각 '도'와 그 밑의 수많은 행정구역들로 굉장히 체계적이고 정교한 모습으로 각각의 행정구역들이 설정되어 있었으며, 각 지역마다 일종의 치안판사라고도 볼 수 있는 관료들이 파견되어 있었고 행정관이나 관료들은 현지에서 선출되지 않고 모두 과거를 통과한 뒤에 중앙정부로부터 각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이러한 체계적인 관료제와 중앙집권국가의 모습은 18세기까지는 서유럽에서조차 굉장히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