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평가 (문단 편집) ==== 천문학 ==== 천문학 또한 발전해 [[칠정산]] 같은 한국 최초의 역법이 만들어졌고 세계에서 2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 최초의 고경도 석판 위에 새겨진 전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또한 제작되는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는 동시기 서양 기술로 제작된 지도에 비교하면 그 정밀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있다.] 산학과 역법은 [[베이징시|베이징]]의 서양 [[선교사]]들의 역법을 받아들이면서 17세기까지 일본에 대한 우위를 유지하였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1643년 조선통신사 사절중 독축관(讀祝官) 박안기에게 [[칠정산]] 계산법을 전수받고 이것을 연구하여, 1682년 시부카와 하루미(澁川春海)가 일본 최초의 역법인 정향력(貞享曆)을 완성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월성은 18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일본이 에도 시대가 무르익으면서 역전되었다. [[조선 통신사]]에 대한 대접도 점점 더 하락하여 [[순조]] 11년인 1811년에는 더 이상 통신사가 가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이것은 일본이 서서히 [[국가 막장·멸망 테크|국가 막장 테크]]를 타던 것도 한몫을 했다.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는 비용을 조달하려다가 민란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을 지경이니, 언젠가는 이런 식으로 접대하는 수준을 축소하자는 논의가 나올 판이었다. 당장 [[조선 통신사]]가 중단된지 불과 50년만에 일본에서 [[쿠로후네 사건|무슨 사건]]이 터졌는지를 보자. 그리고 조선 통신사가 폐지된 지 불과 12년 만에 [[오시오 헤이하치로]]라는 [[사무라이]]가 [[에도 막부]]의 무능함으로 인해 백성들이 굶어죽는 사태에 분개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조선 통신사가 폐지되기 약 30년 전인 1783년에는 일본사 최악의 대기근 사건인 [[텐메이 대기근]]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 사신에게 접대하는 수준을 호화롭게 한다면 나라 재정이 버틸 수 없다.] [[북학파]]인 [[홍대용]]이 1766년 의산문답(醫山問答)으로 자전을 주장한 것은 최소한 200년 늦고, [[실학자]] 최한기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중역으로) 받아들인 건 발견 300년 후였으며[* 1857년의 '지구전요(地球典要)'. 중국보다 15년 늦었다. 다만 세종 시대 때 [[이순지]]가 막연하게 지동설을 주장한 적은 있었다.],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과 [[윌리엄 허셜]]의 근대 천문학을 (역시 중역으로)받아들인 것은 발견 180년 뒤(1867년의 '성기운화(星氣運化)')였다. 이는 유럽보다 250년 이상 뒤쳐진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기학]]을 통한 독자적인 해석에 기반하였다. 최한기는 근대 의학 역시 신기천험(身機踐驗, 1866년)을 통해서 소개했으나 이것 역시 막 서양인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중국의 서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실패한 개화와 [[일제 강점기]]의 억압적 교육 정책을 바탕으로 한국의 과학은 [[한국전쟁]]까지 사실상 전무하다 싶은 정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단 역법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서양 천문학을 서서히 학습해 나갔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인식과 다르게 조선은 서양 과학에 그리 무지하진 않았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서양 천문학이 계속 갱신되었기 때문에 19세기에 불완전한 지식에서 완전한 지식을 얻었다고 봐야 한다.[* 열린연단 문중양 참조.] 영조대에 저술되어 구한말에 증보된 [[증보문헌비고]]를 보면[* 천문학 상위 부분은 영정조대에서 크게 보충하지 않았다. 18세기에 꾸준히 도입되었던 서양 학문이 19세기에는 다소 정체되었기 때문이다. 문중양][[https://www.krpia.co.kr/viewer?plctId=PLCT00004498&tabNodeId=NODE04256740#none|#]] 18세기 조선에서 통용되던 서유럽의 천문학을 확인할 수 있다. [[요하네스 케플러|케플러]](刻白爾)와 [[뉴턴]](奈端)등 당대 서유럽 과학자들의 연구 실적을 인용해 조선의 하늘에 맞게 보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모습이 보인다. 관에서는 19세기 홍대용이 저술한 서적보다 훨씬 일찍부터 전문적이고 수학적인 법칙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