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군 (문단 편집) === 해군의 제도화 === 고려 말인 1389년(창왕 1년) 박위 등은 [[왜구]] 근절을 목적으로 [[대마도]] 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럼에도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자 조선 개국 후인 1396년(태조 5년) 김사형 등이 병력을 이끌고 다시 한 번 대마도를 정벌하게 되었다. 1419년(세종 1년) 왜선 50여 척이 충청도 해안을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태종(조선)|상왕 태종]]은 [[이종무]]를 삼도 도체찰사로 삼아 그해 6월 19일에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이때 동원된 함선은 227척, 병력은 1만 7,285명에 달했다. 20일에 대마도에 도착한 원정군은 다수 적병을 참수하고 조선인, 중국인 포로들을 구출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이 [[여말선초]] 시기에 세 차례나 대마도를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수군력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선 초에 이르러 수군은 육군과 분리된 병종으로 지위가 확립되었는데, 이는 고려 말의 수군 제도를 계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수군의 강화는 역설적으로 왜구의 잦은 침입에 기인한 것이었다. 태종은 즉위 이후 국방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며 수군 체제도 정비하였다. [[거북선]][*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과는 다른 것이다.] 등 군선을 건조하고 화기류를 중심으로 다양한 탑재 무기를 개발하였다. [[세종(조선)|세종]]도 부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조선술을 발전시키고 대규모로 군선을 건조하여, [[맹선]](猛船), 병선(兵船) 등 829척에 이르는 군선을 보유하게 되었다. 당시 수군의 총 병력은 5만여 명에 달했다. 그러한 거대한 병력은 수군 도안무처치사, 첨절제사, [[만호]] 등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 15세기 이르러서는 수군의 지휘체계가 확립되었다. 1457년(세조 3년)에는 전국 지방 군사 조직이 [[진관체제]]로 통일되어, 육군과 더불어 수군도 [[절도사]]-첨절제사-만호의 일원적인 지휘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민웅, 《조선전기(15~16세기)의 수군 변천》, 이순신연구논총, 2010] 이러한 노력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이순신의 손에 크게 빛나며 조선을 구해냈다. 당시 조선군이 대적한 일본군은 병선 숫자만 2,200여 척에 달하는, 양적으로는 당대 지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전력이었는데, 조선군은 이에 ~~[[칠천량 해전|한 번 빼고]]~~ 밀리지 않고 오히려 시종일관 우세를 점했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부터 숙종 중기까지 조선 수군은 '''부인할 자 없는 동아시아 최강의 수군'''으로 군림했다. 청나라도 두려워 떨었을 정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