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군 (문단 편집) == 문제점 == >내 오늘의 일을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근데 고려도 [[카다안의 침입]]당시 쿠빌라이한테 "당태종도 고구려에게 패했고 우리도 너희를 굴복시키는데 매우 큰 힘을 쏟았는데, 왜 지금은 그깟 도적떼에 쩔쩔매는가?" 라고 디스당한적이 있으며 이를 보면 당시 고려가 왜란시기 조선보다 국방에서 더 나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과거의 군사력을 지금보다 높게 치는 것은 명백하게 침략과 정복까지 거리끼지 않았던 [[고구려]]를 제외하면 어지간해서는 [[좋았던 옛날 편향]]이다.][*반론 고려시절과의 비교를 좋았던 옛날 편향만으로 볼 수는 없다. 물론 카다안의 침임 같은 흑역사가 있긴 하나 이 때는 여몽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원나라의 강력한 통제력 하에 놓여 있었기에 과거와 같은 저력은 보여주기 힘들었다. 그럼 과거는 어땠느냐? 여요전쟁의 경우 1차 침입은 상황을 잘 파악한 고려에 의해 그렇게 큰 피해를 입지 않고 거란군을 돌려보냈으며 강동 6주를 얻었다. 2차 침입때는 정말로 나라가 망할뻔하긴 했지만 이 때도 어쨌든 '''자력으로''' 거란군을 물러나게 했다. 3차 침입은 말할 것도 없이 '''자력으로, 완벽하게''' 승리했다. 이후 벌어진 여진족의 침입도 동북 9성을 일시 점령하는 것으로 한방씩 주고받았다. 즉 조선과 고려를 비교하는건 좋았던 엣날 편향이 아니다. 물론 고려 말의 군사력이 심각하게 허약해지긴 했다만 왕조 말기란게 다 그렇고 정작 이 말을 한 선조는 조선 중기의 임금이다. 또한 선조 38년은 임진왜란 끝난 후의 일이고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던 때이니 중원 왕조들조차도 무너뜨리기도 했던 북방민족인 거란, 여진들조차 자기 힘으로 막아낸 고려에 비해 여지껏 제대로 된 체계의 침공은 없었던 일본의 침입 하나 혼자 못 막아내(물론 이 때는 정규군 침공이긴 했다.) 명나라에게 도움을 구했던 현재가 많이 비교되었을 것이다.~~선조:고려는 거란도 여진도 혼자 막아냈어! 근데 왜 우린 왜놈 하나 자력으로 못 막아내냐고!~~][* 근데 이건 당시 일본을 너무 과소평가한것이다. 당장 [[고려 말 왜구의 침입]]시절부터 당시 고려의 군사력이 개판된것을 감안해도 왜구는 이미 조직적인 군대의 모습을 갖추고 고려를 괴롭혔으며 16세기때는 [[척계광]]이 [[원앙진]]전법을 고안해내기전까지는 조선보다 훨씬 국력이 강했던 명나라도 왜구에게 남부지방을 유린당했었는데 정규군도 아닌 왜구조차 명나라를 고전시킬 정도의 전투력을 가졌으니 조선이 자력으로 10만이 넘는 일본 정규군을 물리치는건 불가능한게 당연하며 오히려 군기강이 해이해진 상황에서도 자력으로 [[니탕개의 난]]을 보면 대단한 수준이다.][* 마이너한 역사라 그런지 조선이 [[니탕개의 난]]을 막아낸 것에 대한 의의가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는데 고려시절부터 여진족 1만이 모이면 당해낼 자가 없다는 말이 있을정도로 여진족들의 전투력은 높이 평가받았으며 여진족들의 세력이 약해진 조선시대때도 여진족들의 잠재력만큼은 조선과 명나라 양쪽에서 높이 평가 받아 15세기 조선은 여진족들의 세력이 조금이라도 강해질 기미가 보이면 예방전쟁으로 짓밟아버렸는데 [[니탕개의 난]]은 그런 여진족들이 만단위 세력을 형성할 정도로 성장해서 조선을 침공한거라 '''[[니탕개의 난]]을 막아낸건 결코 과소평가받을 일이 아니다.''']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 말 [[홍건적의 난|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고려)|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위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참고로 이 사례는 홍건적이 빠른 기동성을 주무기로 삼는 기병 부대나 해적 집단이 아니어서 고려도 병력을 집결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서 가능했다. 반면 이후 극심해지는 왜구의 침입 때는 이런 대응이 불가능했다. 이 당시 상황은 훗날 조선군에게도 여러모로 시사할 점이 많다. 당시 왜구는 틈만 나면 수백 척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이건 이미 붕괴된 고려 지방군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였다.그래서 급박하게 중앙군을 보내도 권신들의 사병+대충 징집한 민병으로 이루어진 중앙군 역시 질적으로 우수하지 못했다. 게다가 왜구는 고려 중앙군이 내려오는 소식을 들으면 미리 내빼거나 아예 매복하고 있다가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지방군을 극도로 억제한 조선은 결국 원인은 다르지만 같은 고민들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1, 일정규모 이상의 적이 오면 맥없이 붕괴되는 지방군. 2, 급히 파견되는 중앙 장수와 중앙군+타 지역징발군으로 이루어진 군대. 3, 타이밍이 늦어 적에게 공세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못 살리는 자국 군대. 여기에 대한 조선의 선택은 지방군을 키우는 게 아니라 우수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중앙군 시스템을 양적 질적으로 진보시키는 것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당대 어느 나라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었다. 물론 조선도 [[을묘왜변|2차 을묘왜변]]등 지방군선에서 외침을 정리한 사례가 없지는 않다.] '''이는 사람의 수효가 전조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사천(公私賤)은 날로 번성하는데 반해 군졸의 액수는 날로 감축되기 때문이니, 호령과 군정 또한 전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의(私意)로 헤아려 보건대 [[북송|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자고로 국세가 이와 같으면 반드시 이적(夷狄)의 화를 받는 법인데 우리 나라의 일이 실로 염려된다. 무략만 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재상|재집(宰執)]]들 중에도 병법을 아는 사람이 없고 신진 문사들은 전연 무사(武事)를 모르고 있다. 내가 조신(朝臣)들을 경홀히 여기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시세(時勢)를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무신은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반드시 독서한 연후에야 고금 성패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열 가지 일을 알아도 한 가지 일을 시행하는 자 또한 드문데 하물며 전연 옛글을 모르는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고사(古史) 뿐 아니라 병가(兵家)의 글을 아는 자 또한 전무하다." >---- >선조 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 기사[* 다만 이 시기 조선군도 군소 여진 부락들을 상대로는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다음엔 당시 부상하는 누르하치의 건주 여진과 대립했을 정도로 강성한 세력인 홀라운이 조선을 노략질 했을 땐, 조선군도 큰 피해를 입었고 이후 여진에 대해 방어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 임금이 경기 감사 유엄(柳儼)을 소견(召見)하였다. 이때에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의 행차가 있었는데, 경외(京外)에서 어수선하여 뜬소문이 크게 떠도니, 임금이 몹시 근심하여 도성을 지키는 것과 강도(江都)에 들어가는 것의 편의 여부를 유엄에게 물었다. 이에 유엄이 대답하기를, > "우리 나라는 외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 "무슨 말인가?" > 하자, 유엄이 말하기를, > '''"우리 나라는 약소 국가입니다. 몽고(蒙古)가 공격해 오면 청인(淸人)의 경우와 같이 접대(接待)해야 하고, 비록 서달(西韃)이 공격해 온다 하더라도 또한 이와 같이 할 뿐입니다."'''[* 양란 이전만 해도 조선은 스스로를 고구려의 후예이자, 고구려보다 넓은 국토를 가진 강대국이라 인식하고 대내외적으로 그걸 과시했다. 그러나 양란 이후엔 이러한 자부심이 무너지고 유학자들 사이에서 조선이 약소국이란 인식이 팽배해지기도 했다.] > 하였다. 이에 임금이 아무 대답 없이 주서를 돌아다보며 이르기를, > "이런 말들은 모두 기록할 필요가 없다." > 하였다. >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는 참으로 약소 국가이다. 그러나 유엄의 대답한 말은 어찌 이다지도 무례(無禮)하단 말인가? 식자(識者)로 하여금 한심하게 여길 만하니, 임금의 대답이 없었던 것도 마땅한 일이다."[* 즉 유엄의 말은 사실이나 그래도 그렇지 그걸 왕에게 대놓고 말하냐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사실 나라가 약소하다는 말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니기에 정히 그런 말을 하고 싶거든 돌려서 하든 순화해서 하든 해야 하는데 돌직구를 해버리니 사신도 무례하다고 까버린 것이다.] >---- > [[http://sillok.history.go.kr/id/kua_11908017_001|영조실록 58권, 영조 19년 8월 17일 정묘 1번째 기사 1743년 청 건륭(乾隆) 8년]] 애석하게도 조선은 대규모의 군대를 유기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하는데 문제가 많았다. 여진족이나 왜구, 반란, 도적을 퇴치하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대규모의 외국 정규군과 맞설 때 문제를 보였다. 물론 조선의 실권자들도 이를 인지하고 마냥 손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지만, 조선의 국가적 한계가 발목을 잡아 끝내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특히 조선은 재정이나 통제 문제로 평시에 대규모 병력을 미리 배치하는 것이 어려웠다.[* 늘 그랬던 건 아니고 호란에 대비하던 광해군~인조 시기를 보면 관서지방의 요새들에 상당한 규모의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조가 [[이괄의 난]]에 데이고 나서 수도방어체제로 선회하는 바람에 명맥이 끊겼다. 사실 이괄의 난 이전의 병력도 광해군이 무리해서 증강해 놓은 거라 당시 조선의 재정으론 감당하기 버거웠다. 변방의 많은 군사들이 이괄의 명분 없는 반란에 동조했던 것도 워낙 부대 상황이 열악해서 불만이 쌓여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괄의 난이 없었어도 그 병력 그대로 12년을 더 버텨 [[병자호란]]까지 갔을 지가 미지수다. 물론 반란이 터진 것보단 훨씬 상황이 좋았겠지만.] 이를 해결하려면 지방 사족들에게 어느 정도 군사적 자율권을 주어야하는데 문제는 중앙집권제를 추구하는 조선의 국왕들 입장에선 정치적 위험이 높을 뿐더러, 지방 사족들이 군사력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발판이 될 수 있어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양민들에게 모든 부담을 전가하는 것 역시 조선이 추구하는 왕도 정치에 어긋나는 폭정이었다.[* [[임진왜란]] 전에 미리 대비를 할 때도, 성을 증축하고 해자를 깊게 파는 것만으로도 민심이 떠난다며 지방에서 올라오는 상소가 빗발쳤다.] 그러나 보니 조선은 국경의 방어선이 가진 종심이 얕아 대규모 외침에 쉽게 뚫렸다.[* 다만 이 경우는 상대(일본, 후금/청)이 뛰어난 기동전을 펼쳤기 때문이다. 특히 청나라의 기동전은 조선으로 하여금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종심이 얕다고 치면 고려 또한 같은 문제점이 드러나야 하고 실제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개성)은 조선보다 약간 북쪽에 위치한 반면 고려 초의 국경은 조선보다 남쪽이었기에 그런 문제가 심각했어야 했다. 그러나 거란의 1차 침공에서 곧 개경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성종이 다른 곳도 아니고 개경보다 더 북쪽인 서경(평양)까지 올라오기도 했다. 물론 반대로 이 때는 적들도 조선때처럼 뛰어난 기동전을 펼친건 아니었지만. 실제로 몽골의 침략이 있었을때는 '''경주'''까지 공격당했을 정도로 처참하게 털렸다.] 조선이 우수한 행정력을 바탕으로 급히 병력을 징발하고 소집해도 적의 본대는 이미 영토 깊숙이 들어온 뒤였다. 이 상황에서 조선의 최고 지휘관이 전국의 병력을 일시분란하게 지휘하여 적을 포위섬멸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당시 교통통신 기술로 그건 불가능했다. 또한 조선군의 최고 지휘관은 얼마 되지 않는 휘하 병력으로 자기 구역의 전선을 유지하느라 바빠 타지역을 신경 쓸 여유도 부족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조정에서 수없이 내려오는 간섭과 훈수를 적절히 대처해야만 했다. 왜냐면 전시의 조선 조정은 군대에게 주로 공격적인 작전을 요구했다. 사실 조선 조정도 이러한 작전이 생각없이 한것이 아니고 그들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게 당장 왕의 안위가 위험하기도 했고, 전쟁이 길어지면 조정의 권위가 추락하고 왜란 시기의 의병처럼 지방 세력이 자체적으로 들고 일어나게 되었다. 지방 세력의 군벌화는 중앙집권을 추구하는 조선 왕조 입장에서 그 어떤 것보다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지나쳐서 나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결국 각지의 조선군은 서로 원할하게 연계하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싸워야 하는 경우가 흔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유격전을 벌이며 잘 싸운 사례도 있지만, 유기적인 운용 부족으로 적군에게 무력하게 각개격파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밖에 부족한 숙련병과 부사관 계층으로 인한 부대 통제의 어려움, 원거리에 편중된 병력 구성으로 생긴 취약한 야전 능력도 큰 난관으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조선군은 지휘관 입장에서 봤을 때 지휘난이도가 매우 높은 난해한 군대였다. 다른 나라였으면 이런 식으로 군대를 엄두도 못 냈다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물론 반대로 생각하면 무과로 선발한 조선의 인재와 인력이 이런 군대도 어떻게 굴러가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우수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특기할 점을 하나 꼽자면 조선시대의 군사력 약화가 동서고금의 다른 여러 나라와 달리, 체제의 붕괴가 아니라 체제의 정비와 완성 단계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조선군은 통치세력의 능력과 주변 환경의 영향을 따지기 전에 군사제도 설계와 운용에서부터 심각한 결함을 내포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조선군의 문제점이라고 지적되는것들은 알고보면 조선이 영향을 많이 받은 [[명나라]]도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라 조선에게만 뭐라하는것은 부당한 면이 크다. 당장 조선을 비웃은 명나라만 해도 [[토목보의 변]]에서 대군을 동원하고도 2만의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황제가 사로잡히는 굴욕을 겪었으며 조선처럼 황제들과 대신들이 군사적 역량이 모자라는데도 그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장수들에게 무리한 전쟁을 강요했다가 [[정난의 변]], [[송산 전투]]처럼 우세한 상황인데도 열세인 적군에게 참패하는 참사를 발생하게 만들었다. 이면의 사정을 살펴보자면, 조선군의 경우 대규모 전투가 드물다보니 독자적으로 군제를 짜기엔 실전 데이터가 모자랐고, 중국의 군제를 많이 참조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당시 중국인 명나라의 군사제도가 조선 입장에선 모방하기 좋은 게 아니었다. 명나라는 초기에 부병제의 원리에 기반한 위소제를 운용했는데 이것이 16세기쯤 되면 유명무실해져 북로남왜라 불리는 가정 연간의 외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한 사례까지 있을 정도였다. 참조:[[https://www.instiz.net/pt/6009168?frompc=1]]] 이때 [[척계광]]이 나서서 자신이 고안한 전술로 남왜와 북로를 소탕했다. 남쪽의 왜구를 상대하기 위한 전술은 기효신서, 북방의 기마민족을 상대하기 위한 전술은 연병실기라는 저술로 남겼고, 이것이 조선에도 도입되었다. 연병실기의 거보기영진은 조선의 지형 특성상 운용하기 어려워서 기효신서의 절강병법이 주축이 되어 도입되었는데, 문제는 이 절강병법이 각 병종 별로 굉장한 수준의 전문성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척계광도 따로 병사를 모집해서 사병+상비군, 혹은 국가가 고용하는 용병의 특성을 지닌 척가군을 운용했다. 다만 이게 단순한 사병은 아니고 엄연히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군대였다. 상당수는 정규군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한국사를 찾아보면 이성계의 가별초, 혹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들과 비슷하다.] 병농일치가 근간인 조선으로서는 숙련병을 제대로 수급할 필요가 없어서[* 조선 후기엔 오군영 체제로 가면서 조선도 나름 상비군을 운용하는데, 제대로 된 직업군인은 훈련도감뿐이고 나머지 군영은 지방군이 교대로 번상해서 복무하는 형태라 절강병법이 요구하는 훈련도를 갖추기 어려웠다.] 절강병법을 현지화 하여 삼수병 체제로 운영했다. 그런데 삼수병 체제는 살수의 비중이 매우 적고 포수와 사수의 비율이 과도하다보니 기병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호란 때 조선군이 청나라의 기병대에게 처참하게 패하는 원인이 된다.[* 애초에 원본인 절강병법 자체가 기병이 아니라 보병인 왜구를 상대하는 전술이라 기병 상대로 효율적이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