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군 (문단 편집) === 유명무실해진 지방군 === 조선은 이전의 한국사 왕조들에 비하면 편집증적인 수준으로 국가의 군사력 전반을 완전히 통제하는데 집착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지나쳐서 만약 중앙의 행정력으로 지방의 군사력을 파악하거나 통제하기 여의치 않다면 '''통제가 가능한 수준까지 군사력을 축소'''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애초 조선이 [[태조(조선)|태조 이성계]]가 당대의 최고위 무장으로서 [[위화도 회군|쿠데타]]를 일으켜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건국 초기부터 유력 가문들의 사병(私兵) 보유 금지가 국가의 중요한 정책 목표로 자리잡았고, 사병을 혁파한 이후에는 지방의 정규군도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정예병을 보유한 변방의 군사 책임자에게 조정의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가 뒤따랐기 때문에 결국 지방의 군사 책임자들 대부분이 군사 훈련에 소극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군적 역시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장부상으론 수백 명이나 수천 명의 병력이 있어도 정작 전시에 출정하려고 보면 실제 인원은 그것의 반도 채 안 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딴에는 대비를 열심히 한 임진왜란 때도 제대로 군사를 조련해 두었던 지휘관은 이순신을 비롯한 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성을 쌓고 군량미를 비축하는 일에 그쳤거나 그것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때문에 병력이 부족하거나 없는 성이 많아져 왜란 초에 조선의 성들이 일본군에게 매우 손쉽게 함락되었고, 심지어 비축된 군량미들이 통째로 일본군에게 넘어가서 전쟁이 장기화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병자호란 때는 청을 상대하기 위해 평안도에서 야심차게 정예군 육성을 시도하지만, 그 지휘관인 이괄이 중앙정부의 권력 다툼에 관련되어 위기에 몰리자 반란을 일으켜서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반란을 진압한 장수들조차 조정의 극심한 통제 때문에 제대로 군사를 훈련시키지 못했고, 그들에게 주어진 병력도 소수의 군대만 주는 바람에 전쟁 당시에는 청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도 못하고 분전하다가 죽는 사태가 벌어진다. 무엇보다 주력군의 병권을 인조가 측근들에게 넘겨줬는데 문제는 이들이 지리멸렬한 지휘[* 개개인의 유능, 무능을 떠나서 김경징-장신, 김자점-심기원의 사례처럼 자기들끼리의 의견 충돌로 군대 자체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각자 따로 놀게 만들었다.]로 도박수를 감행한 청나라를 행복하게 해줬다. 양란 이후 조선에선 지방군 강화를 위한 여러가지 논의가 있었다.[* 개중에는 일본처럼 [[봉건제|봉건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조선이란 나라의 정치적 정체성과 맞지 않아 포기하고 대신 강력한 중앙군 육성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비대해진 중앙군은 자연스럽게 막대한 재정 수요를 창출했고 조선은 이걸 장기간 건실하게 유지할 역량이 없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후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