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군 (문단 편집) === 전기 === [[파일:thumb_org_xman1717_2011-05-24[1].jpg]] [* 조선 전쟁사 분석서 '조선 전쟁 생중계'의 삽화를 담당한 "불나방"의 그림. 조선 전기의 찰갑을 비롯한 군졸의 무장 상태가 잘 고증되어 있으나, 알다시피 조총은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 중기부터 사용되었다. (흔히 인식하는 바와 달리 조선은 왜란 이전부터 조총의 존재를 알았다. [[조총]] 문서 참조.) 물론 찰갑은 조선 중기에도 여전히 쓰였다.] 초기 조선군은 고려 왕조를 쿠데타로 접수해 [[고려군]]의 체계를 그대로 계승했다. 고려군과 마찬가지로 조선군 역시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뉜다. 중앙군은 고려 시대부터 있던 2군 6위에 태조 1년(1392) 이성계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 좌, 우위 2위를 더해 10위(十衛)로 구성된 의흥삼군부로 구성되었다. 각 10위에는 취재라는 시험을 통해 선발된 [[갑사(역사)|갑사]]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이후 [[갑사(역사)|갑사]]는 [[오위]] 중 중군(中軍)인 의흥위 소속으로 모두 편입된다.]. 그러나 태조 3년(1394) 의흥친군위와 나머지 8위의 지휘체계가 달라 혼선이 있다는 판의흥삼군부사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10위는 10사(十司)로 개편되었다. 이에 중앙군이 4개의 시위사(侍衛司)와 6개의 순위사(巡衛司)로 편제되었고, 중군(中軍)에는 ○○시위사, 좌군에는 용○순위사, 우군에는 호○순위사가 배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조선)|태종]] 즉위 이후 시위사를 9개로 증강하고 순위사를 1개(충무순금사)만 남겨놓게 되었다. [[세종(조선)|세종]] 즉위 이후 10사는 무려 12사로 증강되었으나 1424년 다시 10사로 돌아왔고, 이후 1445년에 또다시 12사로 늘어났다. 결국 [[문종(조선)|문종]] 1년(1451) 기존 시위사들을 5사(五司)로 통폐합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 12사 병력 뿐 아니라 기존에 [[금군]]에 포함되던 별시위, 총통위, 방패 등도 5사에 속하게 하였다.[* 이는 오사를 번상시에는 경군으로, 부방시에는 지방군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이후 세조 대에 오사는 [[오위]]로 개편되었는데, 각 위에는 [[갑사(역사)|갑사]], [[팽배수]], 친군위, 파적위 등의 부대가 소속되었으며, 지방에서 번상하는 정병들은 출신 지역에 따라 나누어져서 근무했다. 이를테면 경상도 출신 정병은 용양위에 배치되었고, 평안도 출신 정병은 호분위에 배치되었다. 다만 한양 출신 정병은 무작위로 배치되었다. 총통위는 해체되었으나 중앙군과 지방군 각 부대에 화약무기가 보급됐다. * 중군(中軍) * 의흥친군좌위(義興親軍左衛) →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 → 의흥위(義興衛, 중위) * 의흥친군우위(義興親軍右衛) → 충좌시위사(忠佐侍衛司) → 충좌위(忠左衛, 전위) * 응양위(鷹揚衛)[* 고려 2군 중 하나인 응양군과 용호군이 통합되어 개편된 부대.] →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 → [[금군]] * 금오위(金吾衛)[* 본래 비순위의 다른 명칭이었지만 어느 순간 분리되었다. '''금오'''라는 명칭은 이후 [[의금부]]의 별칭이 된다.] → 신무시위사(神武侍衛司) →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에서 개칭.] / 충무순금사(忠武巡禁司)[* 이 두 순금사는 도성 내 치안 업무를 관장했다.] → [[의금부]] / 충무위(忠武衛, 후위) * 좌군(左軍) → 용양위(龍驤衛, 좌위) * 좌우위(左右衛) → 용양순위사(龍驤巡衛司) * 신호위(神虎衛) → 용기순위사(龍騎巡衛司) * 흥위위(興威衛) → 용무순위사(龍武巡衛司) * 우군(右軍) → 호분위(虎汾衛, 우위) * 비순위(備巡衛)[* 도성의 치안을 맡아보던 부대] → 호분순위사(虎賁巡衛司) * 천우위(千牛衛)[* 고대 중국에서 황제를 지키던 무사들이 차던 칼을 천우라고 지칭하는데서 유래한 명칭] → 호익순위사(虎翼巡衛司) * 감문위(監門衛)[* 성문을 지키던 부대] → 호용순위사(虎勇巡衛司) 지방군은 크게 육수군(陸守軍)과 기선군(騎船軍)으로 나누어졌다. 육수군은 각 도에 있는 영과 진에 복무하며 [[병마절도사]]의 지휘를 받는 영진군(營鎭軍)과 돌아가며 서울에서 궁궐을 지키던 시위패(侍衛牌)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선군은 말 그대로 수군으로 [[수영(동음이의어)#s-2|수영]]에 배치되어 [[수군절도사]]의 지휘를 받았다. [[경국대전]]이 반포된 후엔 기선군은 수군으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여기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도 있었다. 이후 세조 대에 이르러 조선 초기 지방군사제도인 [[진관 체제]]가 자리 잡았는데, [[진관 체제]]는 전국을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으로 나누어 이중 삼중으로 틈틈히 방어망을 구축한 제도이다. 제진은 거진의 명에, 거진은 주진의 명에 복종하였으며 허락 없이 타 진관을 지원하는 것은 성종 대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주진의 장은 [[병마절도사]]였으며 거진의 장은 병마첨절제사(첨사)나 판관[* 조선 시대 각 지방의 행정, 군무의 실무를 맡아보던 관리], 제진의 장은 병마절제도위가 맡았다. 단 첨사나 도위 같은 경우 해당 지역의 지방관이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현감이나 현령이 도위를 겸임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진관 체제]]는 대규모의 적을 상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지적되었고, 실제로 [[니탕개의 난]] 당시 3만여명에 달하는 여진족의 준동에 취약점을 노출하였다. 따라서 선조 대에 [[진관 체제]]는 [[제승방략]] 체제로 개편되었다. [[제승방략]]은 외적의 침입 시 각 진관의 병사들이 사전에 지정된 장소로 이동하여 집결하고 이들을 수도에서 파견된 경장(京將)이 지휘하는 체제였다. 하지만 [[제승방략]] 역시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문제점을 보이며 폐지되었다. 태종~세조 시기 조선군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북방 방비 및 여진족, 왜구 토벌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국경 확립에 공헌한 [[4군 6진]] 개척, 1396년과 1419년에 있었던 2차례의 [[대마도]] 정벌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후로는 국토 방어에 힘쓰며 가끔 [[예방전쟁]] 성격을 띠고 [[여진족]] 부락을 토벌하는 것 이외에는 대외 확장은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 진법을 계승하고 후일 집대성해서 [[문종(조선)|문종]] 때 오위 진법으로 나타난다. 오위 진법은 장군 아래 5위를 두고, 각 위는 5부가 있고, 각 부는 4통으로 구성되고, 사통 2부대는 기병과 2부대는 보병으로 구성되는, 보병과 기병을 균형있게 운용하여 적을 막으면서 각 부대 간에 상호 지원할 수 있게 만든 탄력적인 진법이다. 기병은 중기병 40%, 궁기병 60%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환도(무기)|환도]]는 기본착용했다. 추가적으로 기병은 척후도 담당했는데 보통 10리 정도 안팎을 정찰하였다. 보병은 5가지 병종으로 구성되었다. 방패와 환도로 무장한 [[팽배수]], 소형 총통으로 무장한 총통수, 장창으로 무장한 창수, 길이가 긴 외날 칼인 장검으로 무장한 장검수, 활로 무장한 궁수로 구성되었으며 이 중 총통과 [[팽배수]]는 무조건 20%가 포함되어야 하며 나머지 병종은 상황에 따라 가감할 수 있었다. 단순 비율만이 아니라 도끼나 철퇴 등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등 전장의 즉응성을 강조했다. 진영의 경우 [[팽배수]]가 1선에서 팽배와 환도로 무장하여 대기하고, 총통수가 2선에서 저격을 가하고, 3선과 4선에 있는 창수와 장검수가 들어오는 적을 요격하면, 5선에서는 궁수가 적을 저격하는 식으로 운영하였다. 병종 상관없이 [[찰갑]]이나 다른 갑옷을 입었으며, 총통수를 뺀 나머지 병종은 [[환도(무기)|환도]]를 패용해서 근접전을 대비하였다. 전술적으로는 기본적으로 방위위주로 모루인 주통과 예비대인 전통으로 나누어진다. 적이 오면 주통과 전통이 합세하지만 적이 물러나도 주통은 진을 지키고 전통이 나아가서 적을 섬멸한다. 이 진법이 쓰인 당시 주적은 [[여진]]과 [[오이라트]] 족으로 정주민이 [[유목민]]을 어떻게 상대하야 하는지 고민이 드러난 전법이다. 그러나 오위진법은 유목민 상대에 특화된 전법이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막는데 큰 실패를 겪었으며 이후 명에서 들어온 [[절강병법]]으로 대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