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군 (문단 편집) === 비현실적인 원거리 무기 집착 === 조선군은 이상할 정도로 [[화기]]를 비롯한 원거리 무기에 집착했다. 국토는 좁고 산지는 많으며, 이렇다할 정예 상비군도 부족했던 조선 특성상, 성에 틀어박혀 원거리 무기로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것이 가장 가성비 높은 전략이었다. 따라서 조선 이전의 한국사 왕조들 역시 원거리 무기를 선호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이는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화력덕후]]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된다.] 문제는 조선의 경우 이 경향이 빈약한 지방군이라는 단점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시대에 따라 병종의 구성이 다르긴 했지만 조선의 기본 전술은 접근해오는 적들을 투사 병기로 타격하고 기병으로 제압한다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백병전 병과도 편제에 있긴 했지만 이들의 기본 역할은 사수나 포수를 적의 돌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대규모 전투에서 공격적으로 운용하기엔 숫자가 너무 적었다. 특히 사수, 포수, 총통수 등의 원거리 병종의 숫자가 백병전 병종의 숫자와 비슷하거나 심하면 2배 이상으로 많았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백병전 병종이 적군을 공격하려고 나서면 원거리 병종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원거리 병종도 자체적으로 [[환도(무기)|환도]]정도는 들고 다녔지만 그건 권총 수준의 호신 도구에 불과했다. 조선군의 원거리 화력이 나름 강했다고는 하지만, 15세기[* 이때까지 조선의 원거리 전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나, 조총의 도입 이후 원거리 전력에 추가적인 연구나 신개념 작동방식 등이 거의 도입되지 못하고 쇠퇴해갔다.]가 지나면 백병전 없이 적을 섬멸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조선군보다 원거리 화력이 몇십 배나 우월했던 근대 유럽의 군대들조차도 [[총검 돌격]]과 기병전을 비롯한 [[백병전]]을 수세기에 걸쳐 수행했다.[* 유럽전사상 가장 선진적인 형태의 화력 운영으로 유명한 나폴레옹의 군대 역시 백병전 수행을 중요시 여겼으며 많은 훈련량으로 개인화기 빠른 장전속도와 높은 정확도로 유명한 영국군 역시 백병전 수행을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백병전의 종말은 기관총을 비롯한 자동화기의 등장 이후에야 가능했다. 조선의 화력이라고 해봐야 결국 [[화승총|조총]]과 [[오르간 건|오연자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만으론 적의 대군을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었다. 조선군의 부족한 백병전 능력에서 무수한 군사적 문제점들이 파생되었다. 일단, 원거리 화력으로 적을 압도해도 정작 백병전으로 적에게 치명타를 날리지 못하다보니 적을 확실하게 섬멸하는 결정력이 떨어졌다. 게다가 적이 피해를 감수하며 어떻게든 조선군의 화망을 뚫고 백병전을 걸어오면 대응도 못하고 맥없이 진영이 붕괴되기 십상이었다. 또한 조선은 화약 생산량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설령 한 부대가 전투에서 적을 이겼어도 화약을 다 소모해서 한동안 전투력을 상실하기도 했다. 이렇게 백병전과 난전에 취약하다보니 [[기병]] 없이는 공격적인 작전이 힘들었다. 하지만 조선군은 히든카드였던 기병조차도 재정 문제 때문에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대접전에 특화된 중기병의 숫자가 줄어들어 대기병 전력과 대 보병 충격력이 너무나 부실했다. 조선의 체제적 특성상 백병전 병과를 육성하기 쉽지 않았고, 어렵게 육성해 놓아도 오래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왜냐면 백병전을 담당하는 병사들에겐 좋은 무기와 갑주, 그리고 꾸준한 훈련이 필요한데 조선의 빈약한 재정과 지휘관의 군사 훈련을 극도로 통제하려는 지침은 우수한 백병전 전력과 양립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왕의 호위를 맡은 병사들만큼은 백병전을 잘했다. 이들은 애초에 피지컬이 좋은 인적 자원을 선발하는데다가 좋은 무장을 지급받고 훈련도 많이 했다.] 더욱이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중앙군이 상비군화 한 것을 제외하면 일정 1년의 3분의 1 가량 번갈아 가며 군역을 치루는 구조다. 그래서 대신 비용과 훈련이 덜 필요한 원거리 병과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원거리 병과인 사수와 포수는 좋은 갑주가 필요 없어서 무장 비용도 상대적으로 쌌고, 훈련도 많이 필요 없었다. 활쏘기가 신분,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인기있는 스포츠였던 조선에 뛰어난 궁수는 넘쳐났고, 총은 쉽게 숙련될 수 있었으니까. 다만 초기에는 그래도 백병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록도 있는걸보면 마냥 등한시하지도 않았던듯하다.[* "올적합(兀狄哈)은 부딪치기를 잘하니, 팽배(彭排)와 창검(槍劍)이 아니면 방어하기 어렵습니다. 팽배는 준비하기 쉬운 물품이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더 준비하도록 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리고 만약 저장해 둔 창검이 많지 않으면 수를 헤아려서 더 보내는 것이 적당합니다."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02008_002]]] 또한 세간의 인식과 달리 도검을 주무기로 삼은 병과들도 있긴 했다. [[무예청]] 무사[* 무예별감(武藝別監)이라 불리며, 무예청은 용호영, 호위청 등과는 별개의 국왕 호위 기관이었다. 장용위의 초기 맴버들이 이곳 출신.]들 중에는 보직에 따라 칼만 패용하던 경우가 있었고[* 대령무예청, 가대령무예청], 세자익위사 무사들 중 일부[* 사어(司禦)] 또한 검을 지니고 호종하였다고 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조선/평가, version=1838, paragraph=10.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