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군 (문단 편집) == 의의 == 그래도 15세기 조선은 대외로 무력을 투사하는데 꽤나 적극적인 편이었다. 고려말 왜구 및 원나라 잔당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군대는 불세출의 무장인 이성계가 세운 새 나라의 안정된 통치 아래 강군으로 재편되었고, 이 유산은 100여년 이상 이어져 15세기 내내 좋은 성과를 여러 번 냈다. >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 "들으니, 올적합(兀狄哈)[* 만주어로는 우디거(숲사람)라고 하며 조선시대 두만강(豆滿江) 일대에 살던 야인 여진의 분파이다. 비록 명나라 아래 있었던 건주 여진이나 몽골에 가까웠던 해서 여진에 비해 문명 수준은 낙후되었으나 호전성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명나라 세력권에 속해 있어 조선이 공격할 땐 명나라 눈치를 봐야 했던 건주여진, 너무 멀어서 당시엔 부딪힐 일이 없는 해서여진과 달리 조선과 직접적인 충돌을 가장 많이 일으켰던 세력이었다.][* 문명 수준이 낙후되었다고 보기도 애매한 것이 실록에 보면 "알타리(斡朶里)와 올량합(兀良哈)은 사는 집에 풍족하지 못하여 집이 좁고 더러웠는데, 올적합은 집이 크고 깨끗하며 또 큰 궤를 만들어 쌀을 담고 집집이 쌍다듬잇돌(雙砧)이 있으며 밭이 기름지고 개 · 돼지 · 닭 · 오리도 많이 길렀다"거나 "(올적합의 집은) 대들보 하나로 된 집이고 그 만듦새는 중국인이 사는 집과 서로 닮았다"라는 이계동의 언급이 있는데, 이계동은 "올적합이 예전에 개원위(開原衛) 사람을 잡아다가 남녀가 혼인하여 여러 세대를 살아 왔기 때문에 그 사는 집의 만듦새가 이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 [[https://www.fmkorea.com/5366988869]]]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 올적합은 당시 야인여진 중 가장 강하고 호전적인 세력이었으니 그런 올적합을 털어버린 조선군이 두만강 일대 여진 부락들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로 여겨지는건 당연한일이었다.]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 > 평안도 도원수 이극균을 인견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403014_003|#]][* 여진족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이후 해당 올적합 토벌에 대해 귀화한 여진족인 동청례가 강성하던 금나라도 못한 일이라며 여진족들을 회유했던 근거로 써먹은 기록이 있다."대금(大金)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ja_10310007_002]]] 실제로 15세기때는 [[여진족]]들을 정벌할 때도 1만단위의 병력을 모아 압도했고 [[이시애의 난]] 당시 수만병력을 어렵지 않게 동원한적이 있다.[* [[이시애의 난]] 진압과정을 보면 [[용인 전투]]마냥 단순히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들로 보기도 어렵다.] 또한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군이 중점으로 뒀던 토벌전만 놓고 보면 명나라와 비교해도 조선군의 전과는 나쁘지 않았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twar&no=263124&search_head=70&page=113|#]][* 당시 명나라는 비록 [[토목의 변]]이후 [[영락제]]시절에 비해서는 국가위상이 낮아졌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오늘날 미국정도의 위상을 가진 강대국이었다.] 1467년 조선과 명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만 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군의 5분의 1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군보다 병력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으며[* 당시 명나라군은 1만명당 128명의 여진족을 죽였다.], 예상치 못했던 럭키샷이 터져 예전부터 골칫거리였던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조선군이 직접 죽여 복수하기도 했다. [* 출처:[[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dbGubun=SD&category=Report&m201_id=10038483&local_id=10052878]]] 조선군이 건주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가 [[세조(조선)]]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404009_001|#]][* 하사품이 하도 많아서 [[세조(조선)]]가 "우리 나라는 작은 공(功)으로써 천은(天恩)을 우악하게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다만 여진족이 그렇다고 마냥 오합지졸들도 아니었던것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신이 평소에 올적합(兀狄哈)과 올량합(兀良哈)을 알고 있는데, 성질이 굳세고 사나워 싸움하기를 즐겨하며 죽고 사는 것을 따지지 않고 진중(陣中)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한곳에 모여 사는데, 3, 4백 명에 밑돌지 않습니다. 그러나 3, 4백명으로도 우리 나라의 1만 군사를 당해낼 수 있습니다."라고 당시 여진족들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하는 성종시기 기록도 있고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여진족들의 부락을 공격한적이 있는데 여진족들이 반격하려하자 피해가 커질것을 우려해 철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진족들이 단순히 오합지졸이었다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할리는 없으니 전투력에서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겪은 일본인이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상대로 여겨질정도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석하는게 맞고 이정도면 못해도 오늘날 [[탈레반]]과 [[하마스]] 같은 무장단체정도라고 볼 수 있다.[* 탈레반과 하마스가 비록 [[미군]]과 [[이스라엘군]]에 비해서는 훈련과 장비 모두 열악하나 미군과 이스라엘군도 아무 군대나 보내는게 아니라 특수부대를 보낼만큼 탈레반과 하마스의 게릴라 전술은 무시못할수준이다.] > 함길도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계하기를, > "올적합(兀狄哈)·올랑합(兀郞哈) 등 잡종들은 갑옷과 투구도 쓰지 아니하고 열도 이루지 아니하고 싸우나 활[弓]을 잘 쏘기 때문에 상대하기 어려우니, 나무로 방패(防牌)를 만들어서 사용하되, 매양 싸울 때에 이것을 전열에 세우고 기창(騎槍)·기사(騎射)를 뒤에 세우면, 비록 겁이 많고 약한 자라도 반드시 등지고 달아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 하니, 그대로 따랐다. >---- >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407018_004|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7월 18일 계유 4번째기사]] >"갑옷을 입은 적은 얼마나 되던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겨우 20, 30인이고 그 나머지는 다 푸르게 물들인 반신(半身)의 납의(衲衣)1133) 를 입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군사와 말은 하나도 죽거나 다친 자가 없었는가?" >하자, 이계동이 아뢰기를, >"옥천(沃川)의 군인 김응보(金應輔)가 화살에 다리를 맞아 말에서 떨어져 기절하였다가 되살아났으나 이튿날에 죽었고, 화살에 맞은 말은 서넛뿐입니다." >---- > [[http://sillok.history.go.kr/id/kia_12211016_003|성종실록 259권, 성종 22년 11월 16일 무자 3번째기사 ]] 어쨌든 철기가 없거나 소수에 불과할 땐 조선의 토벌군이 여진족을 상대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누르하치 세력이 흥기하면서 갑주를 입은 철기병을 대규모로 굴리기 시작하자 상황은 반전된다. 이성량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운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갑옷을 수입하거나 아예 제작기술을 확보하여 대규모 중기병을 거느렸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정규군을 상대로는 게릴라전이 고작이었던 탈레반정도의 무장단체가 갑자기 정규군 못지않은 기갑부대를 거느리게 되자 정규군과 전면전이 가능해질정도로 전투력이 비약적 상승한셈이다.] 게다가 [[여진족]]들을 성공적으로 통제 하에 둘 수 있었던 건 정규군 외에 조선군의 [[특수부대]]였던 [[체탐인]]들의 활약이 컸다. [[세종(조선)|세종]]때 창설된 이 부대는 정말 오늘날의 특수부대처럼 소규모로 적진에 침입해 낮에는 은신, 밤에만 이동하면서 주로 여진족들에 대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주기적으로 교대로 활동하던 체탐인들은 여진족들이 쳐들어올 낌새를 미리 알아채고 보고하기도 하였으며 여진족을 정벌하러 갈 때 미리 그들이 주둔지를 정찰하여 지도를 그려오기도 했다. 때문에 사망률도 높은 대신 임금도 후한 정예 정찰 부대였다. 자세한 내용은 [[체탐인|항목]] 참조. 허나 바로 위의 [[성종(조선)|성종]] 시절, 전쟁은 줄어드는데 자꾸 체탐인들을 보내 사상자가 나온다며 조정에선 이를 [[책임]]질 사람을 끈질기게 추궁했다. 결국 지휘관들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소극적인 부대 운영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성종은 그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체탐인(자) 부대를 해체시켜버렸다. 하지만 여진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 역설적으로 바로 이 체탐자였기에 이후 조선은 여진족으로부터 점점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렇게 조선의 특수정찰부대는 맥이 끊겼다. 젊은 시절의 [[이순신]] 역시 그 피해자 중 하나였고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조선군은 [[정찰]] 능력이 매우 뒤떨어져 고생을 했다. >함경도 안문 어사(咸鏡道按問御史) 이정험이 아뢰었다. > >"신이 이달 4일 토병(土兵)을 시재(試才)하는 일로 행영(行營)으로 달려가는 길에 병사(兵使)를 만났는데, 그는 남·북도(南北道)의 포수(砲手)와 사수(射手) 3천여 명을 거느리고 건퇴를 분탕시키기 위해 번호(藩胡)의 탁두와 약속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행영에 머물면서 첩보(捷報)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8일 신시(申時) 경에 갑자기 영중(營中)에서 곡성이 하늘을 진동하였습니다. 깜짝 놀라 연유를 물었더니 행영의 군사가 싸움터로부터 와서 아무 아무의 존몰(存歿)을 말한 까닭이다.고 했습니다. 신이 바로 행군(行軍)의 승패에 대해 묻자 7일 석양에 아군이 종성(鐘城)에서 탁두의 군사를 대동하고 강을 건넜고 8일 이른 새벽에 건퇴의 적굴(賊窟)에 도착했다. 선봉이 시배(時排) 밖에 있는 오랑캐들의 집에 들어가 분탕할 무렵에 '''오랑캐들이 미리 대비하여 매복시킨 철기(鐵騎) 수백 명이 불시에 뛰쳐나와 칼을 휘두르며 아군을 어지럽게 공격하자 아군이 당해낼 수가 없어 일시에 무너졌다.''' 보병은 산으로 도망치고 기병은 길을 따라 달아나 각기 살길을 찾아 도망쳤다. 우후 성우길이 몸을 돌보지 않고 용맹을 떨쳐 일어나 몇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싸우면서 퇴각하여 직접 오랑캐 서너 명을 베자 적이 조금 물러섰다. 만일 우길이 힘을 다해 적을 막지 않았더라면 아군은 거의 강을 건너지 못할 뻔했다. 하였습니다. >---- >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805022_003|선조실록 187권, 선조 38년 5월 22일 을미 3번째기사 ]] 1605년, 누르하치와 대립했을 정도로 강성한 여진족 세력[* 해서여진의 일파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과 함께 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번호 여진족들을 정복하는 것을 두고 경쟁했었다.]인 홀라온이 함경도를 노략질하자 조선에선 토벌군을 보냈다. 직전 노토 부락을 상대로 우수한 전과를 얻었기에 자신감 있게 진격했지만, 홀라온 철기병이[* 조선 측에선 300명 정도로 파악했다. 기존의 홀라온 기병과는 차원이 달라서 당시 기록엔 혹시 누르하치 세력이 지원온 게 아닌가 의심하는 대목도 있다.] 급습하자 참패하고 우후 성우길의 분전으로 간신히 퇴각만 했다. 조선은 이 전투에서 큰 충격을 받고 여진에 대하여 방어적인 입장으로 선회했고, 나중에 누르하치가 홀라온을 압도적으로 박살내고 조선의 번호들까지 죄다 털어가자 여진족의 부상을 국가의 존망이 걸린 심각한 위기라는 것을 인지했다. 아무튼 개별전투에서 1만이상의 군대를 이끈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고 그마저도 [[용인전투]]같이 머릿수만 채운 오합지졸들이었던 [[임진왜란]]시기 조선의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으로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지만 만약 이 시기 그저 국경부근에서 [[여진족]]의 난동이나 내부 반란정도가 아니라 국력을 총동원하여 막아야하는 [[임진왜란]] 수준의 대규모 외침이 있었다면 조선도 수십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다.[* 사실 조선군은 어느 시기든 단순한 동원력만큼은 수십만 대군을 뽑을 수 있긴 했다. 문제는 이걸 운용할 숙련병과 부사관 계층이 턱없이 얇았을 뿐. 초기 조선군의 활약은 아직 군인의 힘이 강했던, 과도기적인 풍조에 덕을 본 것도 크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체적인 경제 기반을 가진 군인계층이 존재했고 이들이 군대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심지어 조선 초기에는 무려 '''32만이 넘는 병력'''이 동원되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도성(都城)의 둘레가 9천 9백 75보(步)인데, 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 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003) 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 정동(正東)을 흥인문, 정서(正西)를 돈의문, 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홍화문(弘化門) 【곧 동소문(東小門). 】 , 동남(東南)을 광희문(光熙門) 【곧 수구문(水口門). 】 , 서남(西南)을 숭례문(崇禮門) 【곧 남대문. 】 , 소북(小北)을 소덕문(昭德門) 【곧 서소문(西小門). 】 ,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