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군 (문단 편집) === 중기 === 1592년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조선군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고 각지의 산성을 보수하고 [[이순신]] 등 유능한 장수들을 승진시키는 등 준비를 했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일본군의 규모[*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 침공군이 많아봐야 3-4만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적의 숫자는 예상을 뛰어넘어 거의 4배에 달하는 16만이였다. 특히 병력규모 10만 이상의 부대를 상륙시키는 것은 현대 관점으로도 난이도 높은 작전이기에 조선 조정에서도 전국시대가 끝나서 내부 사정이 좋지 못한 일본이 10만 이상의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킬 능력이 있을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것이다.]로 인해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국왕이 수도를 버려 수도가 일본군한테 넘어가고 요동으로 내부를 고민할 정도로 위기에 직면한다. 그러다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활약, 의병들의 봉기와 항쟁, 명군의 대규모 파병,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한 관군의 반격으로 개전 1년 만에 전세가 일본 우세에서 교착 상태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심유경]]의 강화 협상으로 흐지부지되다 일본군이 14만의 병력으로 침공한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만다. 여기서 조선군은 [[제2차 진주성 전투]], [[남원 전투]],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여 전라도가 일본군에게 유린당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이 [[명량 해전]]과 [[직산 전투]]에서 패배하자 일본군은 다시 수세에 몰려 왜성에 의지해 방어만 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결국 일본으로 철수하게 된다. [[임진왜란]] 와중에 [[오위진법]]은 보병 위주인 일본군과 싸우면서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다. 전쟁 중에 일본군이 가진 [[조총]]의 위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화약을 적게 쓰는데도 위력이 나온다는 점도 컸다.] 조선은 [[조총]]을 도입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1593년에 [[조총]]을 모방 생산하는데 성공한다.[* 이는 중앙정부에서 해낸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조총에 맞설 무기를 만들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에서 자체적으로 이룩한 업적이었다. 이순신은 이 조총에 정철총통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이후 그냥 조총이라고 불렸다. 다만,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 사용하게 되는 조총은 이순신이 만든 정철총통이 아니라 명군이 들여온 오스만식 화승총이다. 당시 조선군은 지원군으로 온 명군의 총 [[화력덕후|'''20,000정'''을 들여와]] 조선군을 무장시켰다. ~~본격 16세기판 [[랜드리스]]~~ 게다가 조선 수군 역시 정철총통 3천 정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고,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정유재란 발발 시점에는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더 많은 조총과 총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오해는 왜군의 조총을 부각시키는 미디어의 영향이 큰데, 조선군이 조총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과 별개로 일본군의 주 원거리 무기는 __조총이 아니고 활이었다.__ 정유재란 시점에는 총병의 비중이 많이 줄었지만, 총병의 비중이 더 높았던 임진왜란 시기에도 일본군의 전체 병력 중 많아야 15%~20% 정도만이 조총으로 무장했었으며 이조차도 갈수록 보급이 어려워져 [[임진강 전투]]까지 가서는 조총 자체가 거의 쓰이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단순히 보급의 불능만은 아니고 전근대의 일본이 화약 자체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나라였기 때문으로, 가장 큰 문제로서 '''일본에는 염초 광산이 없었고, 그렇다고 조선처럼 자체적으로 염초를 만드는 기술도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일본군의 초반 파죽지세와 같은 진격은 조선군의 대응 불능과 일본군의 높은 정예도 때문이지, 조총의 영향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 여기에 [[김충선]] 같은 [[항왜]]들의 도움을 받아 [[조총]] 제작 기술이 발달하여 임란 이후에는 조총이 보병의 주력 무기로 정착하게 된다. 또한 명군이 [[불랑기포]]로 많은 활약을 선보이자 임란 이후로 불랑기포가 주력 화포로 많이 쓰이게 된다. 기존 총통들도 꾸준히 개선해서 사용한 것은 덤. 기존 군제가 효용성이 없다는 판단을 가진 조선은 1593년 새로운 중앙군으로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를 토대로 [[조총]]을 쓰는 포수(砲手), 창검으로 무장한 살수(殺手), 활로 무장한 사수(射手)로 구성된 삼수병 체제로 전환한다. 지방군 역시 1594년에 [[속오군]] 위주의 영장 체제로 개편되어 기존의 [[제승방략]] 체제를 대신하게 된다. 보통 [[척계광]]의 [[기효신서]](절강진법)를 기반으로 삼수병 체제를 구성했다고 배우는데 기효신서 자체는 단순 병법책이 아니라 왜구를 상대로 농민들을 훈련시켜 편성하는 법을 수록한 책이다. 기효신서는 [[팽배수]], 낭선, [[당파(무기)|당파수]] 등 다양한 병종이 있지만 단병접전에서 [[왜구]]한테 밀리던 조선군 입장에서 근접전은 최소화 할수 밖에 없었고 이는 훈련도감의 삼수병, 즉 사수, 살수, 포수 등으로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은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에서 청군에게 패하였다. 이때 조선은 [[이괄의 난]]으로 소멸된 평안도 북방군을 대신해 [[오군영|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을 신설해 중앙군을 보강하고, 산성 위주 방어 전략을 이용해 청군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청군은 이를 눈치채고 산성을 우회해 한양을 향해 속공으로 나왔다. 여기에 청군 기병에 맞설 기병과 창병이 부재하고 지나친 조총수 위주의 보병 편제로 인해 청군 기병을 저지할 수단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다. 이를 보완하고자 조선군은 전거와 기병, 보병을 함께 운용하는 거기보전을 도입하려 시도했다. 특히 삼수병체제는 기본적으로 보병체제이기 때문에 산성 방어에는 적당했지만 야전에서는 기동력을 가진 청의 철기병에는 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 오위전법을 가져오되 화력덕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게 거기보전이다. 거기가 바로 거대한 기계, 즉 화포를 의미한다. 실제 화거방진도를 보면 하나의 방진은 100량의 화거와 20량의 목화수거로 구성되는데 화거 한대당 조총이 50문에 목화수거는 15문이라는 미친 화력을 뽐내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산이 많은 한반도의 특성상 전거를 운용하기에는 제약이 많았고 조선의 재정이 좋지못해 거기보전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전거와 군마를 대량으로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중에는 예산 문제로 만기요람이라고 군수물자 확인서에는 훈련도감에 전거가 겨우 51량만 있게 된다. 결국 살수가 사용하는 무기 중에서 기병을 상대하는데 적절치 않다고 판단된 장창을 빼고 구창과 협도곤을 추가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이후 숙종 때 왕권 강화 정책의 일환으로 금위영을 신설하면서 [[오군영]] 체제가 완성되고, 수도인 한양 도성과 주변 도시들을 지키게 된다. 왜란과 호란 이후부터 조선군은 조총수가 태반인 보병과 활과 편곤으로 무장한 기병, 불랑기포와 기존 총통을 다루는 포병 전력으로 구성된다. 다만 화포를 만드는데 쓰이는 구리와 화약을 만드는데 필수인 유황의 부족으로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동시대 유럽의 군대가 사용한 것보다 어느 정도 뒤쳐진 것은 사실이다. 이는 구리나 유황같은 화포 운용에 있어 중요한 자원들을 거의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인 탓이 컸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42030|숙종 시기가 되어서야 진산 근방에 유황이 대량으로 채굴되기 시작해서]] 겨우 자급자족을 이룰 수 있었으니 그 고충을 짐작할 만하다. 의외로 전술은 동시대 유럽에서 쓰던 선형진과 유사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조선군이 조총을 주력으로 사용하게 되자 신 유럽처럽 군악대가 편성되어 되었다. 오방색으로 전진하는 방향을 가리키고 북으로 이동하는 거리를 나타내었고 전투시작을 알렸다. 징으로 멈추하게 후퇴를 명했다. 소라로 만든 나각으로(일종의 뿔나팔같은 악기) 소집시키고 나라는 좀더 큰 징으로 전열을 분열시키고 솔이나 방울으로 대열을 정비하고 살수와 조총수를 분리했다.신호를 하기 전에 승자총통 같은 화기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조선후기 진법과 무예 훈련과 관한 연구>[* 朝鮮後期 陣法과 武藝의 訓練에 관한 연구: [[https://s-space.snu.ac.kr/handle/10371/120546|국립서울대학교 S-Space]], [[https://s-space.snu.ac.kr/bitstream/10371/120546/1/000000013644.pdf]].] 그러나 화포 부분에서 유럽과의 격차는 계속 벌어졌다. 사실 18세기 전반까지 조선이나 서양이나 화포 제작법에는 토모를 사용했는데 토모는 습기가 차고 무엇보다 규격화하여 제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대원군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토모의 습기는 화포의 성능을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유럽에서는 [[장 바티스트 바케트 드 그리보발|그리보발]]이 대포 주조틀의 표면을 깎아내는 '천공 기술'을 사용하면서 화포의 규격화에 성공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1750년대에 '강선'이 등장하면서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강선'이 개발되었음에도 1780년에도 활강포를 생산한 걸 보면 불랑기포처럼 불완전했던 것 같다.[* 초기 [[강선]]은 총알을 망치로 때려박아 넣어야 돼서 당시 강선포는 3분당 1발이라는 끝내주게 느린 공격 속도를 가졌고, [[미니에 탄]]이 등장하며 그나마 강선을 제대로 활용하게 될 때쯤엔 이미 강선이 등장한지 100년이나 지난 1850년대였다.] 한편 바다를 지키던 수군은 수도권 인근 해안을 지키던 통어영(統禦營)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통제하는 [[삼도수군통제사|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으로 나눠지게 된다. 정조 때 국방비 절감의 일환으로 통어영과 [[강화도]]를 지키던 [[진무영]]이 통합되었으나(1779), 군사상의 비효율성으로 얼마 후 복구되었다(1789). 숙종~정조에 이르는 시기까지 조선은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였다. 일종의 예비군 개념인 [[속오군]], [[감영]](監營)과 [[병영]](兵營) 소속 정규 지방군 및 수영(水營) 소속 [[조선 수군|수군]], [[오군영]](五軍營)으로 대표되는 중앙군까지 합하여 약 20~30만여명의 병력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4년 7월 4일을 보면 병자호란 바로 전년의 조선군 총수는 약 10~11만에 중앙군은 3만 5천정도, 종전 3년 후이자 최초 기사로부터 4년 후인 18년 12월 1일 기록에는 거의 30만까지 불어나있다. 이후 20만 전후의 규모에서 꾸준히 유지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기병 역시 수만 단위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군의 경우, [[훈련도감]] 6~7천여명, [[어영청]]과 [[금위영]] 각 2천여명[* 장부상의 병력은 수만에 달하였으나 단순히 군포를 납부하는 자도 군적에 넣었던 조선의 특성상 실질적인 병력은 번상정군을 포함한 포수 1~2천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군]] 및 호위청을 합쳐 1천여명 등 약 1만 3천명 가량이 존재하였으며, 이 밖에도 경기일대 방위를 담당하는 [[총융청]]과 수도를 둘러싸던 4유수부 (광주, 수원, 강화, 개성)을 지키던 [[수어청]], 총리영(總理營)[* 정조 연간 설치한 [[장용영]] 외영의 후신이며, 수원유수가 총리사(管理使)를 겸했다. 용인,안산, 시흥, 과천 병력 4초(哨)가 소속되었다.], [[진무영]](鎭撫營), 관리영(管理營)[* 관리사(管理使)는 개경유수가 겸하였다.] 등에 속한 병력이 있었다. 지방군의 경우는 별무사[* 일반적인 기병이 아니라 기사들로 이루어진 정예기병대로, 평안도,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등에 있었다. 여담으로 평안도 별무사는 [[홍경래의 난]] 당시 반군에 가담하였다.], 친기위[* 함경도에 주둔하던 기병대로 함경도 별무사가 개편된 부대], 별기위[* 동래부에 설치되었던 기병대] 등 정예 기병대를 상비 병력으로 운용하였다. 보병들은 사수와 살수가 도태되고 포수 위주로 개편되어 아예 포군(砲軍)이라 불리는 등 [[조총]] 위주의 편제가 굳어졌다. 청과 인접하여 있던 평안도의 경우, 2만 가량의 수비군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군은 군대의 양만 지속적으로 늘어났지 정작 실질적인 전력은 중앙군의 규모인 수만 단위로 계속 머물렀고 지방군은 여전히 형편없어 지방의 반란조차 제대로 진압못하여 중앙군을 파견해서 진압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는 조선 조정을 고질적으로 괴롭힌 좋지못한 재정, 그리고 왜란과 호란 이후 100여년에 걸친 평화가 중앙군과 삼남 지방의 지방군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지방군의 춘조/추조 (봄, 가을의 훈련)이 이루어지던 [[숙종(조선)|숙종]]~[[영조]] 시기와는 다르게 [[정조(조선)|정조]] 시기부터는 춘조나 추조가 제대로 치루어지지 않았고, 성을 방어하는 훈련인 성조마저도 기준을 채우지 못하였다. 수군의 경우는 80~100척 가량의 판옥선이 삼도수군 (충청, 전라, 경상)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서히 약체화되어가고 있던 지방군과는 달리 수군은 청나라 해적, 이양선 출몰 등의 위협으로 적어도 순조 때까지는 잘 유지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군 역시 나중에가면 함선 수의 감소와 병력 감소 등으로 인해 육군과 사정이 비슷해질 정도로 서서히 약체화 되어가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