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군 (문단 편집) === 후기 === || [[파일:Korean_soldiers_and_Chinese_captives_in_First_Sino-Japanese_War.png|width=100%]] || || [[청일전쟁]] 당시 청군 포로를 관리하는 조선군 || [[세도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조선의 방위 체계는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가뜩이나 재정도 좋지못하고 오랜 평화로 군대를 크게 유지할 필요성도 없었기에 조선군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기에 서구의 이양선들이 해안에 나타나도 이에 대항할 배 한 척조차 없게 된것이다. 그나마 대원군이 집권하여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설치하고 서구식 포가를 도입하고 신병기 개발에 노력하고 [[오군영]]을 다시 보강하면서 약간이나마 나아진다. 특히 대원군은 [[병인양요]] 이후 서양제 무기의 파괴력을 인식하고 신무기 제작을 진행했다. 대표작으로는 섬유를 겹쳐 만든 방탄복인 [[면제배갑]]이나 수중 기뢰인 수뢰포 등이 있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조선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과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당백전 발행 등으로 조선 경제를 파탄내면서 조선군은 다시 강화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이 사라지게 되고 이후 고종이 친정하자 군대에 대한 지원이 끊기면서 그 결과 [[운요호 사건]] 때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무너진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조선군도 변화를 맞는다. 우선 [[삼군부]]를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아래 군무사(軍務司)를 설치하여 [[오군영]]을 무위영(武衛營)[* [[훈련도감]], [[금군|용호영]], [[오군영|호위청]]을 통합하여 설립한 군영으로 왕의 경호와 궁궐 경비를 맡았다.]과 장어영(壯禦營)[*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을 통합하여 설립한 군영으로 한양과 수도권의 방위를 담당했다.]으로 축소 개편한다. 그 유명한 [[별기군]]이 바로 무위영(武衛營) 소속이었다. 또한 서양의 신무기를 도입하고 보급하는 데 노력했지만 [[임오군란]] 이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은 폐지되고 조선의 중앙군은 청, 일본, 조선의 군사교리가 모두 섞인 신식 군대인 [[친군영]](親軍營)으로 변모한다. 지방군 역시 신식 군대화가 진행되어 [[강화도]]에 주둔하던 친군심영(親軍沁營)[* [[진무영]]이 개편된 군영으로 1894년 해연총제영마저 흡수한다.], [[평양]]에 주둔하던 친군서영(親軍西營), [[대구광역시|대구]]에 주둔하던 친군남영(親軍南營), [[부평]]에 주둔하면서 경기 연해를 지키는 친군기연해방영(親軍畿沿海防營)[*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수군을 총괄하던 통어영(統禦營)이 개편된 군영] 등이 설치된다. 물론 그 당시에도 각 도의 [[감영]], [[병영]], [[수영]]에 소속된 구식 군대는 남아있었다.[* 구식군인들은 주로 포군(砲軍)이라 불렀다.] 한편 중앙의 친군오영은 전후영(前後營)은 [[일본군]]의 영향을, 좌우영(左右營)은 청군의 영향을, 별영(別營)은 전통적인 조선군의 영향을 받아 편제와 교리 등이 중구난방이었다. 그 뿐 만 아니라 당시 [[한양]]에는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 용호영(龍虎營) 등 기존 조선군 군영들도 온전하게 남아있던터라[* [[임오군란]] 이후 설치된 친군영을 고종이 완벽하게 믿지 못하여 재창설되었다.] 중앙군 편제는 상당히 복잡하고 세분화되었었다. 결국 상술한 전통적인 조선군 군영들은 1884년 해체 후 인원들은 친군영에 이관하였으며, 친군영 역시 오영(五營) 체제에서 삼영(三營)체제로 개편한다. 친군 전영과 좌영을 통폐합한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 후영과 우영 그리고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통폐합한 '''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 친군 별영을 개편한 '''친군총어영'''(親軍摠禦營)으로 친군삼영(親軍三營)체제를 유지하였다가 1891년 [[북한산성]] 일대 구 총융청(摠戎廳) 병력을 통위영(統衛營)에서 분리하여 '''경리청'''(經理廳)을 신설하면서 친군사영(親軍四營)체제로 굳어지게 된다. 친군영(親軍營)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실전 경험을 다수 겪기도 하였는데, 장위영(壯衛營) 병력과 심영(沁營) 병력[*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전멸당한 경군(京軍)이 친군심영 소속 병력이다.]이 동학농민군과 교전을 벌인 바 있으며 같은 해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범궐할 당시 장위영(壯衛營), 경리청(經理廳), 평양 기영(箕營) 등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후 무장해제 당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범궐하고 친일내각을 세운 이후 [[갑오개혁]]으로 중앙군은 [[대한제국군 시위대|시위대]][* 미국 퇴역 장군인 윌리엄 다이가 훈련], [[조선군 훈련대|훈련대]] [* 일본군 장교가 훈련]가 설치되어 근대식 군대로 재편된다. 하지만 [[을미사변]] 당시 [[조선군 훈련대|훈련대]]가 [[일본군]]과 결탁하여 아군인 [[대한제국군 시위대|시위대]]를 공격하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가담함에 따라 [[조선군 훈련대|훈련대]]와 [[대한제국군 시위대|시위대]]는 [[대한제국군 친위대|친위대]][* 얼마후 [[대한제국군 시위대|시위대]]로 환원된다.]로 개편된다. 지방군 역시 [[갑오개혁]] 당시 친군영(親軍營)들이 해체된 이후 구식 감영군(監營軍) 혹은 병영군(兵營軍)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터라 [[대한제국군 진위대|진위대]]가 신설된다. 이후 의병 봉기가 빈발해지자 병력 규모가 증강되어 중앙군은 4400명으로, 지방군은 3031명으로 증강되었다. *[[오군영]](五軍營) 폐지 이후 중앙군 군영의 변화 || 명칭 || 시기 || 임무 || 주둔지 || 특이사항 || || 무위영(武衛營) || 1882 || 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 || 한양 || [[별기군]]이 무위영 소속이었음 || || 장어영(壯禦營) || 1882 || 한양과 수도권 방어 || 한양 및 수도권 || - || || 친군 전영(前營) || 1883~1888 || - || 한양 || 일본군의 영향 받음 || || 친군 후영(後營) || 1884~1888 || - || 한양 || 친군 전영과 동일 || || 친군 우영(右營) || 1882~1888 || - || 한양 || 청군의 영향 받음 || || 친군 좌영(左營) || 1882~1888 || - || 한양 || 친군 우영과 동일 || || 친군 별영(別營) || 1884~1888 || - || 한양 || 조선군 전통 교리와 편제 따름 || || 친군장위영(親軍壯衛營) || 1888~1894 || 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 || 한양 || 친군 전영(前營)과 좌영(左營) 통폐합 || || 친군통위영(親軍統衛營) || 1888~1894 || 한양과 수도권 방어 || 한양 및 수도권 || 친군 후영(後營)과 우영(右營),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 통폐합 || || 친군총어영(親軍摠禦營) || 1888~1894 || 한양과 수도권 방어 || 한양 및 수도권 || 친군 별영(別營) 개편 || || 경리청(經理廳) || 1891~1894 || 수도권 북부 방어 || [[북한산성]] || 통위영(統衛營) 병력 중 구 총융청(摠戎廳) 병력이 분리 || || 훈련대(訓鍊隊) || 1894~1895 || 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 || 한양 || 을미사변 당시 왕비 시해에 가담 || || 시위대(侍衛隊) || 1894~1895 || 국왕 경호 및 궁궐 경비 || 한양 ||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와 교전 || || 친위대(親衛隊) || 1894~1905 || 황제 경호 및 황궁 경비 || 한성 || 을미사변 이후 훈련대와 시위대가 통폐합된 조직 || *조선 후기 지방군 군영의 변화 || 명칭 || 시기 || 주둔지 || 특이사항 || || 친군심영(親軍沁營) || 1887~1894 || [[강화도]] || [[장성 황룡촌 전투]] 투입 || || 친군서영(親軍西營) || 1885~1894 || [[평양]] || - || || 친군남영(親軍南營) || 1887~1894 || [[대구광역시]] || - || || 친군북영(親軍北營) || 1894 || [[종성군]] || - || || 친군무남영(親軍武南營) || 1893~1894 || [[전주시]] || 황토현 전투 투입 || || 친군진남영(親軍鎭南營) || 1894 || [[청주시]] || - || || 친군진어영(親軍鎭禦營) || 1894 || [[춘천]] || - || || 해연총제영(海沿總制營) || 1893~1894 || 남양 || 설립 1년만에 친군심영으로 편입 || 중앙과 지방의 친군영들은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갑오개혁으로 인해 모두 폐지되었으며,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조선군은 [[대한제국군]]으로 재편되게 된다. 자세한 것은 [[대한제국군]]을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