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귀족 (문단 편집) === 수작자 === 일본은 경술국치 이후 총 77위의 작위를 수여하였다(후작 6위, 백작 3위, 자작 22위, 남작 46위). 1924년에 수작한 이항구를 제외한 76위는 모두 경술국치 직후 논공행상 및 회유의 대가로 수여한 것이다. 이들 조선귀족 작위 받은 인물들 전부 다 나라를 이끄는 정부 요인, 고위 관료, 장관급에 해당되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았을 때, 밤을 새워 큰 잔치를 열어 기쁨을 만끽했다고 한다.(제목: 敍爵者(서작자)의 喜悅(희열)) 이 중 8인은 작위수여를 거절하였으며, 3인은 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실작, 1인은 자진반납하였다. 김윤식, 이용직 등은 [[자작(작위)|자작]] 작위를 받았으나 [[3.1 운동]] 때 독립 청원서를 보내면서 자작 작위를 박탈당하였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지도 않는다.[* 독립 운동가 월남 [[이상재]](1850년 ~ 1927년)는 김윤식의 자작 작위 박탈을 두고 "왜 그럼 (합방 당시에는) 자작 자리를 좋아라 받아들였냐"며 깠었다.] 남작 작위를 받은 김가진의 경우 실작하지는 않고 해당 작위를 유지했으나, 아예 망명을 하여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리고 유길준처럼 작위 수여 자체를 거부한 사람도 있다. 범죄 등 개인적 일탈로 인하여 실작하는 자들도 몇 명 있었으나, 이 경우 보통 자식에게 습작이 되었다. 1920년, 이완용과 송병준이 각 후작과 백작으로 승작하였다. 왕족이나 인척은 후작, 합방의 주역이나 총리대신 등 고급 관료는 [[백작]], [[을사오적]]과 [[정미칠적]], 현직대신은 자작, 전직 대신 및 민씨 척족은 남작이었다. 단 을사오적과 정미칠적 중 이완용은 겹치기 때문에 11명인데 이완용은 후작, 송병준, 이지용은 백작으로 승작하여 8명만 자작이 되었다. 6,000,000원의 은사금공채는 작위 내에서도 차등 지급했는데, [[왕공족]]인 [[의친왕|이강]]과 [[흥친왕|이희]]에게는 각 830,000원, [[후작]]인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장인 [[윤택영]]이 504,000원, [[흥선대원군]]의 조카 [[완순군|이재완]]은 336,000천 원, 철종의 사위 [[박영효]]는 280,000원을, 나머지 왕족인 [[의양군|이재각]], [[청풍군(1890)|이해승]], [[창산군|이해창]]은 각 168,000원 등을 받았다. 백작인 이완용 150,000원, 민영찬 120,000원, 이지용 100,000원을 받았으며 자작들은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은 100,000원씩, 나머지 현직대신들은 50,000원을 받았다. 남작들은 25,000원을 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의 손자 [[영선군|이준용]]은 168,000원을 받았다. 사망한 친일파인 [[김옥균]], [[서광범]], [[안경수]], [[신기선]], [[우범선]], [[김홍집]]의 유족들에게는 소정의 은사금만 주어지고 작위는 부여되지 않았다. 여담으로 일본 제국이 패전하는 그날까지 '''조선인''' 신분으로 공작에 서임된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구 조선 왕실의 직계인 이왕가에는 [[천황|덴노]] 아래의 '[[왕공족]]' 신분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 뒤에 붙는 '공(公)'이란 호칭은 단순한 존칭의 성격에 그친다. 일본에서도 [[고셋케]](五攝家: 구 교토 공가 중 최고위 가문)나 구 도쿠가와 막부 당주, 거대 다이묘나 조정 원로가 아닌 이상 공작 작위를 받은 사람이 없었고 황실에서 이탈해 화족이 되었다 할지라도 후작이나 백작이었다.[* 조선 귀족의 후작 작위도 '''[[이완용]]과 그 후손을 제외하면''' 조선 왕실 방계나 친인척에 한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