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의용대 (문단 편집) == 분리 == 여러 복합적 원인이 존재하지만 1차적 원인은 조선의용대가 관내지역 최초 군사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주된 활동이 전쟁 상황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무장활동을 할 수 없던 당시 조선의용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데 있다. 대륙 본토에는 조선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규모를 확대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화북지역 더 나아가 동북지역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해당 지역에서 싸우고 있는 조선인들에 대한 소식을 통해 이들과 연합하여 활동하거나 그들처럼 해당 지역을 발판삼아 전진기지를 건설, 최종에는 국내로 진공하고자 하는 조선의용대 본부의 정세판단이 있었다. 또한 중진간부들이 육성한 젊은 대원들의 상당수는 국민당군의 소극적인 조선의용대원의 활용 행태와 전방공작활동만으로 얻을 수 없는 주체적 부대운용의 한계를 지적하며 무장활동을 통한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원하였다. 마지막으로 국공합작이 삐걱거리던 40년대에 좌파적 성향을 띄고 있던 조선의용대 내 전위동맹 계열 대원들과 한빈을 비롯한 공산주의 성향 대원들의 신변의 위협 또한 화북으로의 이동에 영향을 준다. 정리하자면 이미 철 지난 연구 내용이 반영된 개설서 내용과 다르게 조선의용대는 39년도부터 김원봉과 군 중진간부들 사이에서 이미 동북 지역까지의 진출을 염두에 둔 화북진출을 논하고 있었고, 조선의용대의 관내지역 활동의 한계 봉착, 대원들의 무장투쟁활동에 대한 염원, 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어나는 국공합작의 와해분위기로 인한 좌익계열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화북진출 희망 등 복합적 원인에 의해 주체적으로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진출한다. 최근 역사학계에서는 조선 의용대 화북지대는 김원봉과 조선민족전선연맹 차원에서 오래전부터 논의된 조선의용대 내 항일활동의 단계적 수순으로 보고 있으며 화북의 [[팔로군]]에 합류한 이유에 대해선 여러 복합적 원인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낙양에서 집결했을 때 향후 활동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결정한 임시 목적지일 것으로 보고 있다. 태항산으로 들어간 이후 조선의용군으로 중경에 있는 조선의용대 본대와의 분리과정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인 것으로 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