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일보/역사 (문단 편집) ==== 3선 개헌 전후 입장 변화와 [[유신체제]] 시기 ==== 1969년 3선 개헌을 전후로 조선일보는 '친박정희' 노선으로 변해버렸다.[* 조선일보의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조선일보 內 주필 [[최석채]](최석채 주필은 1971년에 물러가지만, 69년 3선 개헌무렵부터 사내에서 그의 입지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가 물러난 것과 더불어 논설, 사설에 핵심역할했던 [[리영희]] 기자가 정부에 대한 강한 비판 사설들 연달아 기고하면서 정보당국으로부터 압력(이 시기동안 리영희 조선일보 기자는 정보당국으로부터 여러차례 협박과 회유를 받는가하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까지 했다.)받아 강제해직 당한 것이 가장 컸다. (특히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비판 사설 글을 여러차례 기고했던것이 결정타.) 리영희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 강제해직 당한 이후, 그동안 박정희가 밀어붙혔던 '언론윤리위법'에 저항하던 기자들이 리영희의 강제해직 전후로 결국 무너져 '친 박정희', 반민주주의적인 논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전후로 조선일보 주필은 [[선우휘]]-김대중 등으로 이어지는 라인들이 주류로 자리잡기 시작해 오늘날까지 자리잡고 있다.][* 3선 개헌을 전후로 조선일보는 정권으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받기 시작한다. 조선일보사는 정권의 허가를 얻어내 1969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최초의 민간차관으로 일본의 이토추상사(세지마 류조가 대표로 있던 회사)로부터 거금 400만 달러를 연리 6%에 들여왔다. 이 돈으로 조선일보는 '코리아나 호텔'을 지었다.] 이후 조선일보는 연일 내내 '친 박정희' 논조를 보이면서 1972년 [[대한민국 제4공화국|유신 정권]] 시기로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싶을 정도로 ''''유신'을 적극 지지[* 이 당시 조선일보는 4.19 혁명때 참여하다 후에 변절한 사람들 동원해가면서 '10월 유신은 4·19정신의 계승'이라는 성명서~~ 망언~~를 크게 보도했다.]한 뒤 '유신 찬양 시리즈'를 잇달아 내보내면서 반민주주의적인 입장'''을 확실하게 보였다.[* 조선일보 1972년 10월 18일자 사설 '평화통일을 위한 신체제' - [[http://srchdb1.chosun.com/pdf/i_archive/index.jsp?Y=1972&M=10&D=18&x=79&y=11|#]] ] 그러나 [[동아일보]] 기자들을 시작으로 일어난 '언론자유수호운동' 당시 1975년 3월 6일 조선일보 기자들은 "진실에 투철해야 하는 기자로서의 열과 성을 다해 언론자유에 도전하는 외부권력과의 투쟁은 물론 언론 내부의 안이한 패배주의와도 감연히 싸우려 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정론지 제작을 요구하며,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신문제작 거부를 단행하기로 결의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조선일보 경영진은 몇 명의 간부들을 동원하여 통신기사 위주의 파행적 신문제작을 감행하면서 3차에 걸쳐 주도적인 기자 33명을 파면 또는 해임(1명은 재입사)시키는 등의 조치를 통해 신문제작 거부 농성을 6일만에 강제 해산시켰다. 강제 축출된 조선일보 기자들도 '조선언론자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를 결성하여 지속적인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계속되는 강력한 통제로 인해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고 언론은 유신정권이 끝날 때까지 장악되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615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