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족 (문단 편집) == 역사 == 오늘날 조선족의 직계 기원은 19세기 중후반 [[간도]]로 이주한 주민들에서 주로 찾는 편이다. 만주는 대개 몽골-튀르크계 민족들이 거주하던 내몽골 동부 고원 지대 그리고 과거 고구려 영토로 대표되는, 그리고 오늘날 한민족이 거주하였던 농경에 유리한[* 조선족들이 벼농사를 짓는 지역이기도 하다.] 비옥한 요동 등 남부 지역 그리고 퉁구스계 삼림 수렵채집민들이 사는 동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구려 영역 관련 지도와 만주 지도를 비교대조해보면 알겠지만, 한민족은 오늘날 만주라 불리는 지역 전체를 다 장악하고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만주에서 알짜배기 땅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조선족과 고대-중세 만주사를 같이 엮는 것은 오늘날 기준으로 다소 과한 민족주의 관점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오늘날 조선족 중 가장 정착 역사가 오래된 집단으로는 무려 400년 전 만주에 정착한 [[랴오닝성]] [[번시시]]의 '번시 박씨'가 있는데, 이들의 조상들은 1619년 [[후금]](後金)을 정벌하기 위해 [[명나라]]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조선시대 [[강홍립]](姜弘立.1560-1627년)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넘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부차(富車.현재의 랴오닝 푸순(撫順)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인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 후금의 포로가 됐던 강홍립의 부하였던 그들이 번시 일대에 정착하면서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강홍립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번시 박씨의 시조는 만주에 그대로 남아 계보를 계속 이어갔다는 것이다. [[https://www.yna.co.kr/view/AKR20100920098900097|연합뉴스 기사]]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086073|KBS 뉴스기사]] 이후 [[팔기군]]에 합류한 조선 출신 박씨 형제들의 후손들은 [[청나라]] 때 [[만주족]]으로 분류되었다가 1958년에는 [[한족]]으로 분류되었고 다시 '''1982년에서야 조선족으로 재분류'''되었다. 특히 이중에서 번시 박씨가 만주족으로 분류되었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청나라 때 편찬된 <팔기 만주 씨족통보>에는 팔기에 속한 1,266개의 성씨가 수록돼 있는데, 그 다수는 만주족·몽골인·한족이지만, 조선인 출신의 성씨들도 43개나 포함돼 있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 지역에 잔류 혹은 이주했던 한민족 상당수가 [[만주족]]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청나라 시대 만주족은 엄연히 귀족이었고, 만주족이 아닌 이상 만주에 체류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팔기군에 소속된 조선인들이 만주족에 편입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청나라 치세 당시에는 한족 중 청나라 황실의 총애를 받은 경우나 벼슬을 받은 사람들이 종족을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바꾸는 경우에서 보듯, 청나라 당시 만주족은 민족 집단이라는 혈통적 개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지배 계급이라는 신분적 개념 또한 함께 포함하고 있기도 했었다.] 상술한 번시 박씨의 경우도 집성촌을 중심으로 모여살면서 외부인들과의 통혼을 최대한 제한하면서 혈통을 보존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어는 거의 대부분 잊어버린 상태였고 조선족으로 인정받고 나서야 다시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즉, 번시 박씨 집성촌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전근대 만주 지역의 한민족 이주민들은 대부분 만주족이나 한족 등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번시 박씨들이 만주족에서 한족으로 그리고 한족에서 조선족으로, 그 뿌리를 확실하게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에게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 [[박(성씨)|박씨]]라는 성(姓) 때문이기도 했지만 박영강을 시조로 지금까지 16대를 이어오며 간직해온 자신들의 [[족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만약 [[족보]]가 아예 없었더라면 자신들의 뿌리를 되찾기란 그 만큼 더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만주 이주는 1860년대 조선에 대기근이 발생하자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간도]] 개척에 나선 조선인들이 그 시초였으며, 이렇게 보면 조선족의 중국 이민사는 길게 잡아도 160여 년 정도이다. 근세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하고 이윽고 [[청나라]]를 성립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한 이후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될 것을 두려워한 청나라 황실은 만주지역을 봉금지역으로 만들어 [[한족]]이 들어가는 것도 막았다. 만주 봉금령은 1881년까지 유지되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쇠락하기 시작하자 [[러시아 제국]]이 만주 일대를 노리기 시작하는데 청나라 조정은 이에 맞서서 1870년대부터 만주 봉금을 단계적으로 해제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족 외에도 조선 사람들도 은근슬쩍 [[간도]]를 중심으로 이민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조선족들의 사실상의 직계 기원이 된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은 조선의 식습관 그대로 쌀밥을 좋아하였고 비옥한 간도 평야지대에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오늘날 중국 동북3성 지역은 중국의 주요 [[자포니카]] 품종 벼 재배지역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조선]]은 점차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은 [[대한제국]]의 성립이후에 노골화되기 시작했는데, 대한제국은 이 지역에 서변계관리사(西邊界管理使)를 파견하는 등, 해당 지역 조선인을 통치하려는 노력을 했다. 되려 [[청나라]]가 행정력유지를 할 수가 없어서 1889년부터 조선인을 대상으로 변발령을 내리는 등, 강행조치를 했는데, 오히려 이 정책이 해당지역 조선인들의 적개심을 샀고 훗날, 대한제국의 간도병합 욕망에 불을 지폈다. 이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은 [[조선인]]이란 정채성이 강했고,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간도병합에 소극적일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조선으로의 편입을 원했다.[* 청나라가 변발을 강요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대한제국은 이에 호응하여 1903년 말에는 선양시 부근까지 영향력을 확장했으나, 1905년에 [[을사늑약]], 1907년에 [[정미조약|군대해산]]을 당함으로서 1897년부터 대한제국이 추진했던 간도편입은 추진력을 상실했다. 1909년의 [[간도협약]]이 체결됨으로서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우리 [[대한민국]]에 포함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날아갔고 이후 조선족의 역사는 [[한국사]]와 완전히 분리되어 진행된다. [[구한말]]부터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서 조선을 떠난 사람들이 간도지역에 많이 정착했다. [[경술국치]]이후, 생업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가난한 조선인들이 삶을 위해 조선을 탈출하여 정착하기 위하여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한족]]과 [[만주족]] 지주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후에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는 단초가 된다. [[만주]]에 삶을 찾으러 나간 조선인들도 만주의 동포들에게 미쳤던 야욕을 피할 수가 없었다. 1920년에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공세를 막았지만 [[연해주 4월 참변]]과 [[간도참변]]으로 [[만주]]일대로 나간 조선인에게 흉수를 저질렀다. 이렇듯이 계속해서 만주일대에 대한 침략야욕을 바탕으로 결국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웠다. [[만보산사건 오보사건|오보사건]]부터 [[만주사변]]의 사건까지 중국인들에게 계속된 눈총을 받던 [[동북 3성]]의 조선인들은 [[윤봉길]]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이후로 입지가 나아진다. [[만주국]] 성립 이후에는 [[만주국]] [[신민]]으로서 살게 되었다. 만주의 개척을 위하여 [[오족협화]]의 구호아래 만주에 조선인들의 이주를 장려했는데, 조선인을 [[만주]]로 보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만주로 조선인을 보낸다는 계획은 계속 진행되었다. 1945년 [[만주국]]이 [[소련 점령하 만주|해체]]되면서, [[만주]]는 [[중화민국]]의 치하로 들어갔다. 이후에 조선인들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다.만주의 [[조선인]]들은 만주에 남거나 [[한반도|조국 땅]]으로 돌아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했는데, [[반공|중국이 공산화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이나 [[독립운동가|독립운동을 위해서 만주로 왔던 사람들]], 그리고 [[남한 대토벌 작전|만주로 쫓기듯이 왔던 사람들]]은 대부분은 조국 땅으로 돌아갔지만, 자의로 [[개척|만주에 이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만주에 남았다. 또한 [[중국공산당]]에 협력하여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은 북한으로 가서 [[연안파]]가 되었고 훗날 [[김일성]]에게 숙청되었다. 만주에 남았던 사람들이 조선족의 직계조상 혹은 당사자가 된다. 한편 만주와 중국에 남아서 조선족이 되었던 또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팔로군]]과 함께 [[국공내전]]에서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창건에 근간이 되었고, [[6.25 전쟁]]의 주축이 되어 산화했지만,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연변]]에 정착해 조선족이 되었다. 이렇듯이 본래 친공산당세력들이 꽤 되었기 때문에 연변의 조선족들은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에 꽤나 협조적이었고, 덕분에 수가 적음에도 중국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6.25 전쟁]]시기까지 [[한반도]]로 넘어가지 않은 조선인들을 [[중국공산당]]은 중국인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1952년까지 중국에 정착한 모든 조선인들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는데, 이들을 한데 묶어서 조선족이란 이름의 [[소수민족]]으로 구성하고, [[연변 조선족 자치주|연변에 조선족 자치구]]를 신설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 소수 민족 정책은 [[레닌주의]]에서 제시되었던 소수민족 정책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마르크스주의]]에서는 혁명의 주체를 노동자로 한정지었다면, [[블라디미르 레닌]]은 당시 빈농과 소수민족이 많았던 러시아 상황에 맞추어 혁명의 주체를 노동자 외에도 농민과 소수민족으로 확장하였는데, 이러한 레닌의 소수민족 정책은 민족자치구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으로 이어지는 시대 [[중국국민당]]의 [[장제스]]는 소수민족들을 한족으로 완전히 동화한다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부쳤으나, 당시 군벌들이 활개치던 상황에서 중국의 행정력이 소수민족 거주 지역에 잘 닫을 턱이 없었고 이런저런 문제만 발생시켰다. 이를 목격한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 전후로 "민족 자치 구역을 설정하고 구역 내 소수민족들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한다"는 식으로 한 발 양보하는 척하는데, 그 결과물이 중국 내 여러 소수민족 자치구이다.] 레닌주의 교리에 따르면 민족 영토가 결여된 채 오직 문화에 토대를 둔 민족은 인정받을 수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내 조선족 인구는 유대인처럼 중국 각지에 소수자로 분산되어 흩어져 있던 것이 아닌 이른바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족끼리 마을을 이루어 모여살던 상황이었고, 중국은 이러한 지역들을 묶어서 연변 조선족 자치구라는 행정 구역을 설정하였다. 하지만 조선인 인구는 계속 유출[* 북한으로 넘어가는 인구가 있었다.]되었기에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고, 1955년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격하되었다. 연변에 살던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넘어간 이유는 순전히 [[애국심]]/[[민족주의]]부터 [[소수민족]]에 대한 은근한 차별까지 각양각색이었지만, 사실 [[대약진운동]]으로 [[중국/경제]]가 점점 나락으로 가는 것에 비해서 [[북한]]은 [[소련]]과 [[동유럽]]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전후재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성장가도를 계속 달렸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 내에서 조선족들의 [[북한]] 귀국을 막지 않았다면 조선족 자치구도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