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영남 (문단 편집) === 결혼과 전성기 === 1971년, 군생활 도중 알게 된 배우 [[윤여정]]과 결혼한 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주도한 여의도 평화집회[* 간단히 말해서, [[부흥회]]다. 1970년대 초는 막 '세계최대의 교회'를 건립했던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포함해서 한국 대형교회들이 총집결해서 초대형 전도대회를 연이어 열었고, 1973년에는 100만 인파를 동원했던 최대의 흥행이었다. 현재 [[여의도공원]] 전체와 양쪽 도로까지 포함한 면적 전체가 당시엔 아무 것도 없는 광장이었는데, 거기가 가득 찼었다. 즉, 이걸 절대로 일반 집회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괜히 조영남이 뜬금없이 미국으로 날아가서 '''신학''' 학위를 받고 돌아오는게 아닌 것이다.]에서 성악 쪽 담당자들을 수소문하고 직접 지휘한 후 빌리 그레이엄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 신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수로 돌아오면서 활동도 왕성했지만, 집과는 거리가 멀어졌고, 끝내는 윤여정과도 갈라섰다. 스스로도 윤여정과 갈라섰을 때를 매우 반성하지만 진심으로 [[윤여정]]을 위한다면 윤여정의 '[[ㅇ]]'조차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여론이 대다수다. 사실 조영남은 옛날부터 악명높은 바람둥이였는데 결혼하고도 그 버릇을 통 고치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돈도 한 푼도 벌지 않았다. 오죽하면 '''쌀독에 쌀이 없던 날이 있던 날보다 많았다고 했을 정도다'''. 그래도 윤여정은 결혼생활동안 조영남에게 헌신적이었고, 1970~80년대 미국에서 [[두부]] 구하기가 어렵던 시절 두부를 좋아하던 조영남을 위해 직접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 정도였다고 한다. [[무릎팍도사]] 윤여정 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윤여정에게는 이게 엄청난 트라우마다. 실제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조영남의 '[[ㅈ]]'조차도 꺼내지 않았으며, 그 기세등등한 [[강호동]]과 [[유세윤]]도 몸 둘 바를 모른 채 진행을 했을 정도였다.[* 과거에 윤여정이 [[딴지일보]]에서 참석한 인터뷰에서는 하는 수 없이 조영남을 '''[[C]]'''로 지칭했다. 조영남의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하면 'Cho Yeong Nam'이니까.] 물론, 조영남 본인도 직접 "그녀가 입을 열었다면 조영남이란 사람은 '''사회에서 매장당했을 것'''"이라며 잘못을 시인했다.[* [[파일:external/file2.instiz.net/ce87516b074962e76e81ed95bb5e06b5.jpg]] [br] 이게 윤여정의 20대 시절의 모습인데 최고의 장희빈이라는 타이틀까지 있었던 당대 최고 스타였다. 젊은 사람들에게 윤여정은 그저 원로 배우지만, 젊을 때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인터넷]]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저 때에도 윤여정과 엮이는 결혼과 이혼 문제가 떠돌아다녔다. 실제로 조영남은 인기가 절정이던 [[배우]]를 지옥불로 떨어뜨렸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래놓고는 나중에는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018&aid=0003819538|윤여정이 못생겨서 같이 잘 수 없었다]]는 [[망언]]을 했다. 지금이야 [[양원경]]처럼 결혼 생활 내내 개막장 짓거리를 저질렀다거나, [[송종국]]처럼 [[불륜]]([[간통]])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등의 예들처럼 어마무시한 사고를 친 것이 아닌 이상, (이혼에 대한) 인식은 제대로 잡혀서 이혼하고도 누구든 응원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저때 이혼이라는 건 여자 [[연예인]]들에게 있어서는 마약 복용 같은 수위 높은 사고를 저지른 후 브라운관에 복귀할 수 있는지의 문제와 동급으로 여겨졌을 만큼 사회에서 매장당할 정도로 무서운 것이었다. 조영남과 이혼을 했던 윤여정 역시 그 때문에 매장당할 뻔했지만, 본인과 가까웠던 [[김수현(작가)|김수현]] 덕분에 생활연기인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재기에 성공했다. 이러니까 조영남의 '[[ㅈ]]'만 들어도 경기할 만큼 증오하는 것은 당연지사. 윤여정에게는 당장 지우고 싶은 악몽이 바로 그 때다. 그런데도 조영남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를 "첫번째 결혼시절"이라고 말한다. 윤여정, 그리고 아들과 함께 지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는 말과 함께 당시 세 가족이 함께 찍었던 사진을 이용하여 미술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하여간 조영남은 이혼 후에도 정신 없을 정도로 수많은 여자들과 엽색 행각을 벌였으며, [[1980년대]]에는 자주 여성지에 이름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자신은 자유로운 정신으로서의 자유 연애, 결혼 제도에 대한 실험이라며 되도 않는 변명을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그냥 쓰레기 같은 할배. 이 사람 이상의 개막장은 [[임택근]]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조영남이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가수임에도 불구하고 대중들로부터, 특히 중장년층 어르신들에게 평판이 극도로 나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한테 이미지가 좋냐면 '''그것도 절대로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