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용필 (문단 편집) == 위상 == [[1950년]] [[3월 21일]]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화성)|송산면]] 태생이다. [[경동고등학교]][* 고교 비평준화 시절 서울시내 5대 공립고교 중 하나로 꼽히던 명문학교였다.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경동고가 5대 공립고교다.] 1969년 25회 졸업생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중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경동고등학교 동창회 등에서 졸업생으로 소개되는 것을 보면 중퇴건 졸업이건 경동고등학교 동창회에서는 졸업생으로 인정하는 듯 하다. 졸업식날 가출해서 음악생활을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는걸 보면 졸업은 한 듯 하다.] 1968년 고등학생 시절 활동을 시작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본래는 기타리스트로 데뷔했다. 정확히는 기타리스트 겸 보컬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1979년 "창밖의 여자"로 정식 데뷔했다.[* 지금은 폐교된 경동중학교 출신이고, 경동고등학교는 중퇴가 맞다. 경동고 야구부가 1980년대 부활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해 명예졸업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국내 탑클래스 가수만이 도전할 수 있는 [[잠실 주경기장]] 콘서트에서 7회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콘서트 최다 관객 동원 타이틀도 당연히 조용필이 가지고 있다.[* 과거부터 국내 음악계에선 [[서울종합운동장|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뮤지션으로 국내에선 조용필이 유일하다고 여겨졌다. 참고로 [[이문세]], [[이승환]], [[싸이]] 등도 잠실 주경기장에서 공연을 했지만, 매진에는 실패해서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용필은 그런 주경기장 콘서트를 일곱 번이나 매진시킬 정도의 티켓파워를 가지고 있다.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은 잠실 주경기장: 2010 Love In Love 이틀 10만 명, 1993 해운대 콘서트 단일 10만 명이 있다.] 그의 커리어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010년대에 걸쳐 차트 1위곡을 보유하고 있다.''' [[LP]], [[카세트테이프|테이프]], [[CD]], [[음원]]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히트곡]]과 한국 내 최대 콘서트 인원 동원 기록, [[예술의 전당]] 7년 연속 공연 기록을 가진 가수다. 말이 필요 없는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지상파 연말 가요대상을 전관왕 4회 및 4연패 두번을 포함해 총 11회'''를 수상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1987년 더 나은 음악을 하고자 TV프로 대상 수상 거부를 선언한 결과다. 그의 위치를 미국에 비유한다면 [[프랭크 시나트라]], 영국에 비유한다면 [[폴 매카트니]], 일본에 비유한다면 [[호소노 하루오미]]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셋 모두 대중음악을 상징하는, 대중문화 산업의 최고 거물로 평가받는다. 슈스케에서 [[김태우(god)|김태우]]가 [[이승철]]을 가왕이라고 호칭하자 이승철 曰 '''"그건 용필이 형이지."'''라면서 스스로 부정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이 장면을 두고 '''이승철의 위엄'''을 나타내는 장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같은 가수 입장에서 대선배이자 거장인 조용필을 선배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형이라 부를 만한 사람마저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이승철은 조용필이 술 한잔 하거나 피곤할 때, 운전 기사 역할도 많이 해 드렸다고 한다. 조용필 또한 이승철을 상당히 좋게 평가하는데, 90년대 쯤 "조용필의 뒤를 이어서 누가 공연계의 제왕이 되겠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승철이가 느낌을 좀 살리지 아마?"'''라고 답한 적이 있다. 조용필의 음악적 재능, 음악성, 그리고 엄청난 업적도 있지만 그의 겸손함과 끊임없이 배우려는 마인드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된다.[* 다른 기성 가수들이 현재 아이돌들에 대해 음악도 아닌 이상한 것을 한다며 혹평하는 반면 조용필은 "세대가 다르고 추구하는 음악도 다를 수 밖에 없다. 내가 평가를 내릴 입장은 아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후배들이 자신의 노래를 번안해 부른 후에도 누가 제대로 잘 불렀냐는 질문에는 "각자가 곡을 해석하는 부분이 다르고 창법도 다르기에 누가 더 잘 불렀다고 판단내릴 순 없다. 자신만의 해석과 창법으로 잘 살려 불렀다고 본다."라고 할 정도다.] 조용필은 저런 멘션을 그저 웃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1980년대초부터 정규 19집을 낼 동안 끝없이 자신을 넘고 넘어왔다. 판소리와 락/팝의 접목, 오페라와 락의 접목 등, 장르를 초월한 가수가 그저 되는 게 아니다. 2013년 바운스가 히트할 때도 끝없이 배우고 도전했기에 가능했다.[* 아이돌들이 장악한 현재에도 이 노래는 젊은 세대들이 부를 정도다.] '''그러나, 가왕이란 말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긴 한데, 다름아닌 조용필 자신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4201835305&code=210000&s_code=af090|2011년 4월의 인터뷰에 따르면]] '가왕', '국민가수'와 같은 별칭이 본인에겐 민망하다며 크게 마음에 담아두진 않는다고 한다. 그냥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 자 그대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한다.[* 물론 자신은 겸허함을 담아 한 말이지만 사실 일반인에게는 가왕 같은 수식어보다 오히려 조용필이라는 이름 자체가 더 큰 무게를 갖는다.] [[빠순이|오빠부대]]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가수이기도 하다.[* 사실 오빠부대라는 용어 자체는 1960년대에 영국 가수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 당시 처음 생겨난 용어며 국내가수로는 70년대 [[남진]]/[[나훈아]] 시대부터 있긴 있었다. 그 오빠부대가 짜임새 있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조용필쯤부터다.] 당시 9시 뉴스에서 조용필을 따라다니는 오빠 부대 열성팬에 대한 보도를 이례적으로 내보낼 정도였다. 이 단어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는지 '오빠부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있다.[* 조용필의 인기를 설명해주는 실화 하나를 공개한다. 부산의 한 여고에 어느 교사가 수업 중, 조용필에 관해 얘기를 하면서 "그 친구,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 매면 영락없는 하우스보이지"라고 했더니 수업 중이던 여학생들이 일제히 "그 발언 취소하라"고 들고 일어났고 그것도 모자라 해당 교사가 지도하는 수업도 거부하는 사태까지 있었을 정도다.] >'''여러분, 기도하는~[* <[[비련#s-2.1]]>의 도입부다.]의 다음 가사를 아십니까? 바로 꺄악~입니다.'''[* 음원사이트에서 라이브 공연 버전을 들어보면 관중들의 저 반응이 그대로 나온다. [[https://youtu.be/PKe1812FTh4?t=41|대표적인 예시로 43초부터 볼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미8군 출신의 마지막 히트가수이다. 미8군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시발점이자 중심지였고 프로들의 무대였다. 장르 분화가 강해지고 언더그라운드-인디 개념이 나타나기 전에 바닥부터 올라온 마지막 가수. [[전국구]] 방송이 아닌 지역 기반으로 전국구 스타가 된 마지막 가수다.[* [[이종환(방송인)|이종환]]이 라디오에서 '''지금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벚꽃]]마냥 부산에서 대구 대전을 거쳐 서울로 올라오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