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용필 (문단 편집) == 경력 == 조용필은 경기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던 부유한 집안의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학창시절 음악에 푹 빠져 지냈고 결국 [[고3]]때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심하게 갈등을 겪으며 가출을 하게 된다.[* 아버지가 굉장히 권위적이고 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들들을 데리고 야외에서 사냥을 다니기도 했는데, 조용필은 피 묻은 동물 사체를 보는게 너무 싫었다고 한다. 음악 반대 이유 외에도 부자의 성향이 무척 안 맞았던 듯하다. 맏형이 가장 부친의 성격과 닮아서 사냥을 자주 같이 했고, 모든 형제 중 가장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부친의 사업도 그가 물려받았다고 한다.] 이후 1968년에 [[주한미군|미8군]] [[기타리스트]] 겸 가수로 출발했다. 미8군이라 하면 현재의 나이트클럽 밤무대같은 걸로 연상한다든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을텐데,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모든 시작이 이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1960~1980년대의 모든 대중음악 활동의 큰 장이었다.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에서 활동하다가 곧 "파이브핑거스"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주로 미8군 무대에 올랐다. 그러다 1971년 5월 3인조 록 그룹 "김트리오"[* "[[연안부두]]"를 부른 밴드 "김트리오"와는 다른 그룹이다.]를 결성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트리오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연주자였던 김대환(드럼)[* 대한민국 1세대 재즈 뮤지션으로 유명한 재즈 드러머다.], 조용필,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1972년에는 '드럼! 드럼! 드럼! 앰프키타 고고!'라는 연주 음반도 발매하였다.[* 이 당시에는 최이철이 나가고 '울고 싶어라'로 유명한 [[이남이]]가 베이스를 맡게 된다.] 이때 발표한 곡 "Lead Me On"이 선데이 서울컵 팝그룹 콘테스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학생을 위한 뮤지컬 '사랑의 일기'라는 음반에 "님이여", "사랑의 자장가", "케사라", "하얀 모래의 꿈"을 녹음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상 조용필의 노래가 들어간 첫 음반이다. 이 때 KBS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돌아오지 않는 강"도 녹음했다. 직후 1972년 스테레오 힛트 앨범 제 1집을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음반을 내는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파일:external/www.choyongpil.net/1212826495.jpg|width=500]] 1972년 "그룹 25시"를 결성해서 활동했고, 1973년 [[방위병]]으로 소집되어 해안경비병으로 복무했다. 복무기간 중에도 '''퇴근 후''' 음악 활동을 계속하면서 1974년에는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면서 이 곡과 함께 '''전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재일교포]] 고국 방문과 맞물려 발표된 이 노래는 [[부산]]에서부터 인기가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퍼졌고, 조용필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다. 그리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지금도 [[롯데 자이언츠]]의 1순위 응원가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1977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면서 1979년까지 활동이 금지되었다. 사실 이 대마초 사건은 당시 대마초에 느슨했던 대중예술계의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깔려있었으며 조용필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연예계 전반적으로 연루된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조용필 본인은 대마초 파동 이전 활동 및 음반에 대해서 습작 성향이 짙고 부족한게 많아서 부끄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때 조용필은 붙잡혀서 고문까지 당했고 채혈까지 했지만 대마초 성분이 검출되지 않아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애초에 잡혀간 이유가 이 때로부터 거의 10년전에 미군 공연 초창기 시절에 조용필이 친해진 미군의 권유로 대마초를 한번 피웠다가[* 참고로 이 때 대마초는 관련 규제 법안이 없는 상태였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060900329207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0-06-09&officeId=00032&pageNo=7&printNo=7592&publishType=00020|#]] [[10월 유신]] 선포 이후에야 직접적인 지시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303003292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3-03&officeId=00032&pageNo=1&printNo=9363&publishType=00020|최고 사형까지 구형할 수 있게 됐는데]] 대마초 파동은 바로 그 시기에 터졌으며 문화 정화가 명분이라지만 이미 [[약식기소]]되어 사건이 종결된 [[신중현]]도 다시 잡아가는 등 대중 문화를 때려잡은 문화 탄압이나 다름없었다.]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 몸에 안 맞아서 다시는 안 피웠다는 이야기를 과거에 동료들에게 했던 것이, 당시 연예계를 조지려고 들던 검사와 형사들의 조사로 그들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었다. 태어나서 딱 한번 피우고 몇 년동안 안 피운 대마초 성분이 몸에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부터 10년이면 중금속도 검출이 안 된다. 조용필은 이 일로 [[10.26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대중가요 활동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고 이렇게 전면적인 활동금지 조치가 끝까지 풀리지 않았던 가수는 [[신중현]]과 조용필 단 두 명 뿐이었다. 1979년 지금의 그룹 "[[위대한 탄생]]"을 결성하고, 1년 뒤인 1980년에 1집 앨범 "창밖의 여자"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앨범은 100만장을 팔아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내놓는 앨범마다 히트하면서 1980년대 최고의 히트 가수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