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운 (문단 편집) === [[이릉대전]] === || 손권이 형주를 침범하자 선주는 대노하여 정벌하려 했다. 조운이 간하여 말했다. "국적은 손권이 아니고 조조입니다. 먼저 위를 멸하고 오는 스스로 항복하게 해야 합니다. 조조가 죽었지만 아들 조비가 한나라를 찬탈했습니다. 마땅히 민심을 따라 속히 관중을 도모하여 황하와 위수를 점거한다면 흉악한 역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관동의 뜻있는 선비들은 반드시 군량을 가지고 말을 달려와서 대왕을 맞이할 것입니다. 위를 놔두고 먼저 오나라와 싸우시면 아니되옵니다. 오와 싸우기 위해 병력을 일으켜 교전한다면 싸움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주는 듣지 않고 동쪽(오)을 정벌하러 진격했는데 조운은 강주를 감독하게 했다. 선주가 자귀에서 패하자 조운은 병사들을 이끌고 영안에 이르렀지만 오의 군대는 이미 물러난 뒤였다. - 조운별전 || [[손권]]에 의해 [[관우]]가 죽고 형주를 빼앗기자 분노한 유비는 [[오(삼국시대)|오나라]]를 치러 간다. 조운은 유비 옆에서 직접 동오 정벌을 만류할 수 있을 정도로 측근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운은 여러 이유를 대며 유비를 만류한다. 한실복권이라는 대의를 내세우는 유비는 위를 멸하는 것이 우선해야 할 과제고, 조비의 찬탈 이후 아직 조위가 민심을 진정시키지 못한 틈에 위를 치면 유비의 위명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서북 지방의 호족, 백성들의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실제 유비 사후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자 양주의 천수, 안정, 남안 3군이 촉에게 호응하기도 했다.] 이 역시 조운이 가진 대국적인 안목과 정세에 대한 냉철한 판단력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거기에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진, 매우 분노한 군주에게 직언하는 배짱도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평생을 모셔 일한 군주의 불호령과 같은 결정에도, 이치에서 벗어날 경우 단호하게 '''안됩니다!'''를 외칠 수 있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러나 유비는 원정을 감행하고, 조운으로 하여금 강주를 감독하며 후방을 맡게 한다.[* 강주는 탁고대신인 이엄이 독강주로서 연고지로 삼아 4년여간 감독하면서 반란을 진압하는 등 공적을 쌓고 자신의 기반을 다진 곳이다.] 이 강주는 성도와 형주를 잇는 길이었기 때문에, 보급과 후방 안정화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제갈량이 북벌에서 패배하지 않았음에도 여러 차례 군을 물려야 했던 것이 주로 군량과 보급 문제였음을 감안하면 조운이 후방인 강주에 머무르며 진수했다고 하여 결코 중요도가 낮은 것이 아니다.[* 제갈량은 북벌 때 같은 탁고대신인 이엄에게 후방 군량 보급을 맡겼다.] 게다가 단순한 보급 차원의 후방이 아니라, 유사시 합류하여 참전이 가능할 정도로 규모와 전투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실제로 합류하기도 했다. 다만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익주 평정 후 비관이 강주도독이었으며 223년 이후에는 이복이 강주독을 맡았기에 실제로 조운이 강주도독으로 있으며 실권을 가졌다고 보기는 매우 힘들다.[* 조운이 이 이후에도 지방을 관리하는 직책으로 빠진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명백하다.] 조운별전에서 독강주를 맡았다는 내용이 계한보신찬과 충돌하지만 이는 이릉전을 지원하기 위한 일시적인 임시 군사감독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