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운 (문단 편집) === 남만 정벌? === || 건흥 원년(223년),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했다가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옮겼다. - 조운전 || 유선 즉위 후에는 중호군, 정남장군에 임명되었고 영창정후에 봉해진다. 유비가 죽었을때 탁고대신 이엄은 중도호가 되었고 통내외군사로서 영안에 남아 주둔했다. 유비는 자신의 병사들을 조운에게 맡긴 상황에서, 죽으면서 이엄에게 전체 군권을 맡겼다. 당시 이엄이 중호군/통내외군사로 조운보다 위에 있으나, 영안은 유비의 패잔병과 조운의 남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는 오정벌에 나선 군대, 유비가 거느린 촉의 총 병권 중 온전한 후방 병력은 온전히 조운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갈량은 남중 정벌을 위해, 조운을 중호군으로 임명하여 역할 분배를 시키고 정남장군으로 임명했다. 여기서 중호군은 호군의 일종으로 고급 군대 요직이다. 중령군, 중도호 등과 함께 '''금군'''을 지휘하고, '''무관을 선발'''하며, '''무장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중호군은 중앙군의 성향이 매우 강하며, 무관을 선발하고 무장들을 감독했기 때문에 막강한 군권을 행사하는 핵심적인 요직이었다. 촉의 호군 제도는 동한의 대장군 제도를 답습했는데, 대장군 출정시 중호군 1인을 두었다고 한다. 이 당시 대장군 역할은 당연하게도 남만 정벌과 북벌의 총책임자였던 제갈량이었으므로 조운은 제갈량을 수행하며, 원정군 내에서 중앙군 역할을 하며 군권과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다. 짬밥과 경력을 생각해보면 표현 그대로 당시 군중에서는 최고참일테니 무리는 아닐 것이다. 조운이 이릉 이후 잔병과 온전한 후방 병력을 감독하고 있을 때, 제갈량은 조운을 남중 정벌로 데리고 가면서 중호군, 정남장군으로 삼아 군부의 핵심 요원이 되게 한 것이다. 정남장군은 국가의 남쪽 방면의 정벌 사업이 필요할 때 설치되는 장군직이다. 촉의 남쪽이라 하면 남만인데, 남만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갈량 주도 하에 진압했으므로 정남장군(남쪽 방면의 정벌사업을 주관하는 장군직)인 조운이 제갈량을 수행하여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기록에서는 확실하게 남만 정벌에 참여한 사람이 제갈량과 마속 뿐이라서, 실제로 조운이 전방에서 종군했는지, 아니면 살짝 후방에서 백업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물론 정남장군이기 때문에 실제 통수권자는 제갈량이겠지만 명목상으로는 정남장군인 조운 역시 주장(主將)이고, 당시 촉이 조운 같은 노련한 구장을 놀게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희박하지만 종군했을 가능성이 있다.[*실제 직무를 수행하기보다는 직함과 관직으로서만 기능했을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정이대장군이 오랑캐를 토벌하는 직함이었는지 상기 해 볼 필요가 있다.] 이후 정남장군에서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옮기는데, 이것이 226년이므로 시기상으로 남만 정벌이 끝난 뒤 보직을 옮긴 것이다. 정과 진의 차이는 정벌 사업이 필요할 때 정O장군을 임명하며, 진수(鎭守)하는 것이 우선시 될 때에는 진O장군을 임명한다. 사진장군보다 사정장군이 높은 것처럼 서열상의 고하는 있지만 애시당초 필요에 따라 설치하기 때문에 고하는 큰 의미 없다. 남만 정벌이 필요했기에 정남장군이었고, 동쪽 방면을 진수하는 것이 목표이기에 진동장군으로 옮긴 것이다. 촉의 동쪽은 오나라였고, 이 당시 촉은 오와 동맹을 맺었기에 정벌 사업을 주관하는 정동장군을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