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운 (문단 편집) ==== 전투과정과 퇴각, 전후처리 ==== 이후 제갈량이 기산에 출전하였을 때도 동행하였다. 제갈량은 출군하여 야곡도(斜谷道)를 거쳐 우부풍 미현을 점령할 것이라고 널리 헛소문을 내고 본인은 그 반대면인 기산으로 움직인 동시에 조운에게 [[등지]]와 함께 의병(疑兵), 즉 적을 속이기 위한 허위(기만) 부대로서 기곡으로 출진하여 가서막게 했다. 조운이 장안 등 옹주의 동쪽을 노리는 움직임을 취하자 조진이 군을 일으켜(제갈량전, 화양국지) 막게 했고 대군을 보내 조운과 등지를 상대했다.(조운전) 즉 조운이 기곡에서 [[조진]]의 대군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제갈량의 본대가 군사 배치를 마치고 기산을 제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운과 등지에게 촉한의 북벌군 상당수가 주어졌을것인데, 조운과 등지의 병력이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보낸 대군보다 약해서 패할수 밖에 없었다는 조운전의 기록을 보아 북벌군 중에서도 2진, 3진급 많은 수의 약한 병력이 주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촉군이 공격하려는 곳은 미현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주력 대군을 여기다 투입할 정도로 낚일려면 조운의 이름값과 더불어 그를 뒷받침할만 많은 수의 병력이 일단은 요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진은 분명 대군을 파견했지만, 기곡에서 병력이 적보다 많았다는 제갈량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기곡의 병력은 유사시 한중과 기타 지역을 방어하는 병력으로도 사용되어야 했을테니 상당한 병력이 조운에게 맡겨졌을 것이고 제갈량 본대가 이끌던 병력은 대비가 안 되어 있는 농서를 공격하여 압도할 수 있는 정예병력들을 주로 데리고 갔을 공산이 크다. 이후 기산에 간 제갈량에게 3군이 넘어가자 위 황제 [[조예]]는 관우(關右, [[함곡관]] 서쪽)의 제군들을 대장군 조진으로 하여금 총감독하게 하여(도독관우제군사) 일제히 진군시켰고(명제기) 조진을 직접 파견해 미현에 진을 치게 했다(조진전), 이는 이 시점까지 조운과 등지의 기곡군을 상대로 위나라가 증원을 해야 했을 정도로 아직 조운이 버티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 前趙子龍退軍,燒壞赤崖以北閣道,緣谷百餘里,其閣梁一頭入山腹,其一頭立柱于水中。今水大而急,不得安柱,此其窮極,不可强也,(조운이 퇴군하며 적애 이북의 잔도를 불태운것이 백여리나 되며 지금 물이 많아 기둥을 세울 방법이 없다는 내용) - 수경주 || ||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에서 패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을 물린 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었다. - 조운전 || || 제갈량이 말했다. "가정의 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들을 서로 수습하지 못했는데 기곡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이 처음처럼 잃은 바가 없으니 어찌된 까닭이요?" 등지가 말했다. "조운이 몸소 뒤를 끊고 군자와 집물조차 함부로 버린 일이 없으니 병장들을 잃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조운의 군자(軍資)에 여유분의 비단이 있어 제갈량이 장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니 조운이 말했다. "군사에 이로움이 없었는데(이기지 못했는데) 어찌 하사품이 있을 수 있습니까? 청컨대 그 물건들은 모두 적안(赤岸)의 부고(府庫)에 넣어두었다 10월이 되길 기다려 겨울 하사품으로 삼으십시오." 제갈량이 이를 매우 옳게 여겼다. - 조운별전 || || "대군이 기산과 기곡에 이르러 모두 적보다 수가 많았는데, 이를 능히 파하지 못하고 격파되었으니 이 과실은 군사가 적은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사람(제갈량 본인)에게 있다" - 한진춘추 || || "신이 재주가 없는데도 외람되게 과분한 자리를 차지하여 직접 모월을 잡고 삼군을 독려했으나, 능히 규율을 가르치지 못하고 법을 밝히지 못하고 일에 임해 두려워하여, 가정에서는 명을 어기는 허물을 범하고 기곡에서는 경계하지 못한 실책을 범했으니, 그 허물은 모두 신이 임무를 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 제갈량전 || || "제갈량은 참군인 양양출신의 마속, 비장군인 파서출신의 왕평 및 장목, 이성, 황습등을 선봉으로 하였으나, 제갈량의 지시를 거슬렀으므로 장합에게 격파당하였다. 왕평은 무리를 모아 퇴각의 후미에 섰다. 조운, 등지 또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亦不利)" - 화양국지 유후주지 || 그리고 이 싸움에서 조운은 패한다. 중국어로 실리(失利)라는 말은 단순히 '불리하다'라는 뜻보다는 '시합이나 싸움에서 패하다'[* 실리는 '손해를 보고 이익을 잃다'는 말인즉 '승리하지 못하다' 즉, 전투에서 이기지 못하고 패배함의 완곡한 표현이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다만 화양국지에서는 조운이 맡은 기곡전선에 대해 역불리(亦不利)라는 말을 써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역시 불리했다, 성공하지 못했다'라는 의미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조운은 조운군에 묶여 있다가 후퇴하던 조운군을 추격하는 조진군을 상대로 손수 뒤를 막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채로 적애 북쪽 백리 잔도를 불태우고 후퇴한다. 통로인 잔도를 불태워버렸으니 조운군은 피해도 적었으나 다시 잔도를 공사해야했다. 그리고 조운에 묶여있던 조진군은 자유로워졌고 조진은 직접 북쪽에 있는 월지성까지 올라가서 촉에 호응한 반란군을 진압했다. 조운전의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雲,芝兵弱敵彊)"라는 문구 때문에 후대의 창작물에서는 병력에서도 열세인 전력으로 분투했다는 식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진춘추에서는 오히려 기곡에서 촉군의 병사가 더 많았다는 서술이 있다. 모순은 아니고 말그대로 조운의 군사가 수만 많은 미끼부대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둔전까지 하면서 허위 선전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애초에 기록에서는 조운의 부대를 의병(疑兵), 즉 적을 속이기 위한 허위(기만) 부대로 표현한다. 게다가 조운과 등지의 병사가 약했고, 상대는 강했다라는 기록을 보자면 군사의 수이든 질이든 확실히 무게감이 차이가 있었고, 제갈량이 조운의 전후 수습에 대해서 고평가 한 것을 보면 불리한 상황에서 분투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큰 피해는 없이 후퇴했지만 잔도를 태웠다는 점이 작용한건지 이후 논공행상에서 강등을 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