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운 (문단 편집) == 정사 == 기존에 진수가 쓴 촉서 조운전은 아래에 있는 내용이 전부로 매우 허전하다. 대중이 흔히 아는 조운의 활약상은 이후 [[배송지]]가 조운별전에서 인용해 [[주석(원소)|주석]]으로 보충한 내용이다. ||조운(趙雲)은 자(字)가 자룡(子龍)이고 [[기주]]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람이다. 본래 공손찬의 세력에 속했는데 [[공손찬]]이 [[유비]]에게 [[전해]]를 도와 [[원소(삼국지)|원소]]를 막게 하니 조운이 이에 수종(隨從)하여 유비를 위해 기병을 지휘했다. [[유비]]가 당양(當陽) 장판(長阪)에서 [[조조]]에게 추격당해 처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나자 조운이 [[유선(삼국지)|유선]]과 [[감부인]]을 보호하여 모두 위난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올랐다. 유비가 촉(蜀)으로 들어갈 때 조운은 [[형주]]에 남았다. 유비가 가맹(葭萌)에서 환군해 [[유장(삼국지)|유장]]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서 여러 군현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을 나누어 보내 외수(外水)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게 하니 [[청두|성도]]에서 제갈량과 합류했다. 성도가 평정된 뒤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건흥 원년(223년)에 후주는 조운을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했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했다가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올렸다. 건흥 5년(227년), 조운은 제갈량을 수행해 한중에 주둔했다. 그 이듬해(228년), 제갈량이 출군하면서 야곡도(斜谷道)로 행군하겠다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자 [[조진]]이 대군을 보냈다. 제갈량은 조운과 [[등지]]에게 명해 이것을 막게 하고 자신은 [[기산]]을 공격했다. 조운과 등지의 군사들은 약하고 적의 군세는 강해 기곡(箕谷)에서 실리(失利)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이 퇴각한 뒤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강등됐다. 건흥 7년(229년)에 죽었다. 시호를 추증해 순평후(順平侯)라 했다. (관우, 장비, 마초의 평 이후) 황충과 조운은 굳세고 용맹해 아울러 조아(爪牙=매우 쓸모 있는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됐으니 [[관영|관]](灌), [[하후영|등]](滕)의 무리로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