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운 (문단 편집) === 촉한에서의 위치 === 관우, 마초, 장비, 황충 다음 가는 서열의 위치.[* 비슷하게 같이 묶인 인물들에 비교돼서 까이는 인물로 순욱+순유와 엮인 [[가후]]가 있다.] 연의에서 흔히 [[오호대장군]]이라 불리는 5인의 위상이 무관으로 촉에서 드높았으니 촉의 무관 중에서는 최상위권의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계급은 기곡 전투에서의 패배로 위연보다 낮거나 하는 등 변동이 좀 있다. 논란이 나온 이유는 복합적인데 연의에 묘사된 모습에 대한 반발, 장수로서 확실한 공이 있는 4인과 달리 눈에 띄는 군공이 없는 조운이 같은 위치에 둘 만한가에 대한 문제, 정사 기록은 부실한데 대부분의 활약상이 상대적으로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보는 별전에서 발췌되었다는 것, 조운보다 아래라 여겨졌던 다른 촉한 장수들의 재평가 등이 있다. 특히 위연을 재평가 하는 축에서 이러한 반론을 제기한다. 진도는 기록이 없고, 오의는 인지도가 떨어지고, [[왕평]]은 1세대라기 보단 2세대 축에 드는 장수다. 거기에 오의, 위연 모두 최종 관직이 조운보다 높았다.[* 오의의 경우, 황제의 외척에 유언 당시부터 이어지는 구 세력의 대표같은 존재이기에 관직이 낮았어도, 조운보다 낮은 위치라고는 볼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정사로 보면 미축, 미방보다 빨리 유비군에 합류한 고참 중에 고참인데 전혀 고참에 대한 우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 이건 정사 본문만 봤을때 얘기고 배주를 따른다면 조운의 유비군 합류 시점은 관도대전 무렵으로 이 두 사람보다 뒤의 일이다. 회사를 예로 들면 조운은 언제까지나 유비쪽 회사와 안면이 있던 외부에서 파견나온 인력이였다가 회사가 아예 부도가 나 유비쪽 회사로 스카우트된 사람이고(일본에도 전국시대 때 요리키라 하여 일종의 파견직 근무로 출장나와 다른 사람 밑에 임시로 협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축은 다니던 회사가 유비쪽 회사로 흡수합병 내지 공동 컨소시엄이 돼 이름만 바뀐 회사에서 쭉 다니던 고참급 직원이라 봄이 옳다. 게다가 미축은 유비군 살림을 책임지던 훌륭한 재정 스폰서로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위치였다. ] 미축은 실질적인 권위는 못해도 명분상으로는 제갈량보다 윗줄로 대우 받았고, 간옹과 손건도 미축에는 못 미쳐도 우대를 받았는데 조운은 이런 면에서 소외된 듯 보인다는 것이다. 거기에 유비의 한중왕 즉위와 더불어 황제에게 올리는 표를 보면 관장마황조로 묶이는 다섯명 중에 '''유일하게 조운의 이름'''만은 찾을 수 없다. || 평서장군 도정후 신 '''마초''', 좌장군 장사 영 진군장군 신 허정, 영사마 신 방희, 의조종사중랑 군의중랑장 신 사원, 군사장군 신 제갈량, 탕구장군 한수정후 신 '''관우''', 정로장군 신정후 신 '''장비''', 정서장군 신 '''황충''', 진원장군 신 뇌공, 양무장군 신 법정, 흥업장군 신 이엄 등이 120인이 상언합니다. - 선주전 || 흔히 생각하는 촉한의 최고위 무관 5인 중 한명이라기에는 다른 넷에 비해 권위나 실질적인 네임밸류 그리고 관위 등 모든 것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가장 높았을 때를 보면 관우, 장비 다음[* 유비가 입촉하기 전에는 관우, 장비 다음 서열(편장군)로 황충(비장군), 위연(6품관 이하)보다 직위가 높았다.]이었고, 가장 낮았을 때도 위연, 진도보다 서열이 한단계 낮았지만 (당시 위연의 직책은 독전부 행 승상사마 2품 진북장군, 조운의 강등된 직책은 3품 진군장군) 이것도 기곡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강등되기 이전에는 조운의 직책이 2품 진동장군으로 위연, 진도보다 높았다. 실질적으로 위연의 직책이 조운을 뛰어넘게 되는 것은 조운이 '''죽은 이후'''인 230년 양계 전투에서 곽회를 격파하고 전군사 정서대장군 가절에 임명되었을 때부터다.[* 그런 점에서 제갈량 사후 아쉬워지는 인물이 조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운에 대한 평은 크게 두 종류로, 하나는 용맹하다는 것이고(진수, 계한보신찬) 하나는 덕이 있다는 것이었다(계한보신찬). 한편 별전에 따르면 여러 차례 정치적 식견을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제갈량이 초년이던 시절부터 가까이서 같이 다녔고 행보가 계속 겹치는 상황이니, 직접 간여하진 않아도 굵직한 정치적, 행정적 일들이 돌아가는 분위기는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쪽에서 통하는 사고방식과 언어에 대해서도. 게다가 성격이 좋아 위연처럼 마찰을 일으키고 다니지 않았다. 조운이 마지막으로 가졌던 직함 중에는 중호군이 있다. 조운의 사망 후 1년 가량의 공백을 지나 이 자리를 이어받는 사람이 [[비의]]다. 군부의 인사, 무관 간 관계 조정 등이 중호군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던 점, 이후 [[양의]]와 [[위연]]의 갈등을 비의가 중재했다는 점을 보면 당연히 이들보다 연공서열이 높은 조운이 이들의 갈등을 중재하는것이 이들보다 연공서열이 낮은 비의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촉한의 장군직 서열은 거기장군, 표기장군 > 사방대장군 > 사진대장군 > 사정대장군 > [[사방장군]](전후좌우) > 사진장군 > 사정장군으로 분류 할 수 있다. 보통 사방사진사정대장군 등을 기존 장군직에 대(大)자를 붙여 높여부르는 칭호로 알고 있으나 엄연히 다른 관직이다. (위연이 230년에 임명된 직책은 사정대장군의 하나인 정서대장군으로 사정장군 중 하나인 정서장군[* 230년에 정서장군에 임명된건 강유다.]과는 엄연히 다른 직책이었다.) 참고로 촉한의 관직 서열에서는 사진장군이 사정장군보다 높다. 그 체계가 아래의 잡호장군에게까지 이어지는 모양이며 그 위의 서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대장군(1품)을 제외하면 전부 다 서열상 2품 관직이다. 1차 북벌 당시 조운의 직책이었던 진동장군은 본래 후한의 관직 체계의 의하면 사진장군 중에 하나로 '''거기장군 바로 아래의 직책'''으로 결코 낮은 서열의 직책이 아니었다. 당연히 유비군(촉한)의 군부 내 투톱은 관우와 장비였다. 이후 마초가 합류하면서 둘과 동렬로 평가받았다. || 선주(유비)는 익주목을 겸했다. [[제갈량]]을 고굉(股肱, 다리와 팔, 유능한 보좌관)으로 삼고, [[법정(삼국지)|법정]]을 모주(謀主, 모사)로, [[관우]], [[장비]], [[마초]]를 조아(爪牙, 손톱과 이빨, 용맹한 장군)로, [[허정]], [[미축]], [[간옹]]을 빈우(賓友, 손님과 친구, 친한 벗과 같은 사이)로 삼았다. [[동화]], [[황권]], [[이엄]] 등은 본래 [[유장(삼국지)|유장]]이 임용했고, [[오의(삼국지)|오일]], [[비관]] 등은 유장의 인척이고 [[팽양]]은 유장에게 배척받았고 [[유파]]는 예전에 시기받고 원망한 자이니, 이들 모두를 요직에 두어 재주를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가 다투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선주전 ||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을 각각 전우좌후(前右左後)의 [[사방장군]]으로 임명하면서 황충도 같은 열에 서게 된다. 관우가 황충과는 동렬에 설 수 없다고 반발하기는 했지만 [[비시]]의 말을 듣고 곧 받아들인다. 이 부분만 보면 열전이 묶인 다른 4명과는 생전에 동렬에 서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입촉 전에는 관우, 장비 다음 가는 장수(편장군)였고 화양국지에서는 조운의 익군장군 직책을 사방장군(전장군, 후장군, 좌장군, 우장군)과 나란히 언급한다. 정리하면 처음은 관, 장, 조의 위치였지만 입촉 때 독립 군벌로 위상이 높았던 마초가 합류하고, 한중전 중 하후연을 죽이는 공을 세운 황충의 대두로[* 황충이 조조, 한현 휘하에서 먼저 편장군에 임명되었었다고 하지만 그건 조조, 한현군 경력이고 유비군에서 확실히 조운을 뛰어넘어 관장과 나란히 선 것은 한중전에서 공을 세운 이후다.] 자연스럽게 위치가 뒤로 밀린 것이다. 한중전 이후의 관직을 보면 '관우 (사방장군, 가절월[* 가절보다 한 단계 높다. 삼국 시대 초기를 통틀어 이만한 권위를 가진 신하는 없었으며, 이는 관우가 유일하다.]) > 마초, 장비 (사방장군, 가절) > 황충 (사방장군) > 조운' 순이 된다. 이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기 전까지 [[위연]] 등 보다 위계상 윗줄로서 어디까지나 4인에 미치지 못했을뿐 권위가 크게 부족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유비가 서열만 중시해 위연보다 조운만을 더 중시했다고 볼 순 없다. 현명한 지도자라면, 정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조직 내 서열을 매겨도 인재를 적재적소에 사용하기 마련이다. 정사를 보면 유비는 제갈량에게 가장 큰 실권을 주되 형식적으로 가장 높은 직위를 주지는 않았으며, 필요하다면 그 전까지 아문장 정도의 위치에 있던 위연을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장비를 제치고 조위와의 최전선인 한중태수로 특별히 등용하기도 했으며, 백관들과 심지어 실무자들의 의견을 거스르며 조운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여기까지의 설명은 조운의 위계상 서열이 어느 정도였는지의 대한 것이고, 조운이 4인과 나란히 설만한 인물인가 아닌가의 설명은 되지 못한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조운을 유비의 조아라거나 [[한고제]]의 측근이었던 [[하후영]] 등에 견주는 등 후한 평가를 내렸으며, 조운을 관장마황과 같은 전에 두어 조운이 이들 4인과 나란히 둘만한 인물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정작 정사 조운전은 별전을 빼면 황충전에 버금가도록 매우 부실하여 현대에는 정사에 기록된 유선을 구한 공 정도로는 4인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자치통감]]은 조운별전의 내용을 긍정하고 있으며 현대의 사학자들도 조운별전의 내용을 온전히 부정하는 학자는 드물다. 따라서 별전과 자치통감에 의거해 조운에 대한 진수의 평가에 문제가 없다는 이들과 아무리 그래도 진수의 평가는 나머지 4인과 같이 두기엔 제고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대립하고 있다. 이외에 조운은 촉한에서 시호를 받았다고 밝혀진 12명 중 한명이다. 조운의 행적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시호를 가장 늦게 받은 것에 주목하거나 유선을 구했으니 당사자가 우대한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실제로 조운별전에 실린 유선의 조서에 따르면 유비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는 것과 함께 자신을 구한 일이 명시되어있다. 그리고 별전이 아니더라도 유선이 생명의 은인인 조운에게 시호를 내린것은 정황상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말 총애 받은 진지는 사후 바로 받은데다 진수가 직설적으로 총애해서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그 관장마황(그리고 방통)도 사후 수십년이 지난 260년에야 시호를 받을 수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조운이 늦게 시호를 받은 것이 폄하될 이유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