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운 (문단 편집) ==== 별전 옹호론 ==== 별전류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 조운별전에만 집중되는 것은 문제다. 별전 류라면 화타별전, 순욱별전, 비의별전, 관로별전, 제갈각별전, 우번별전, 혜강별전, 손자별전, 병원별전 등등 후한서, 정사 삼국지에 여러 주석으로 인용된 별전도 많은데 이 별전들 역시 조운별전, 혹은 그 이상으로 기록이 자세하며 조운별전처럼 해당별전에만 나오는 내용들이 있다. 그럼에도 조운별전의 내용만 집중적으로 까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심지어 혜강별전이나 우번별전은 배송지가 인용하며 다른 사서와 내용이 다르다고 했으나 조운별전은 배송지가 그런식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삼국지연의의 버프가 지나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조운별전의 내용을 무작정 신뢰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는 것이다. 거기에 위의 별전류는 일신의 무용을 뽐낸 무장들도 아니고 조운처럼 상대적으로 팬층을 거느린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화제가 되지 않는 면도 있다. 그리고 저들 별전도 이야기에 과장과 살이 더 붙는것이 보여지는데 그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다. 게다가 저 별전들 가운데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실린것은 조운별전을 제외하고는 순욱이 삼공을 사양했다는 [[순욱]]별전의 내용 한 단락과 한중에 있는 제갈량을 정벌하려는 조예를 말리고 팽기라는 인물을 평한 [[손자(삼국지)|손자]]별전의 내용뿐이다. 그러나 조운별전의 경우 굵직굵직한 내용들 상당수를 사용한다.[* 몇몇 부분을 제하거나 약간의 기록을 수정한 정도로 거의 대부분이 실렸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마 관장마황조 가운데선 자치통감 한기 219년 기록을 자신의 이름으로 도배시킨 관우나 독립군벌로 조조와 끊임없이 맞싸운 마초 다음으로 조운의 기록이 많을것이다.] 삼국시대 별전류 가운데 자치통감의 편저자들에게 신뢰받은 별전 내용들은 겨우 이 정도 뿐이다. 그만큼 별전류에 대해서 가려서 봤다는 뜻이고 조운별전은 별전 류 가운데 유독 신뢰받은 기록이란 뜻이다. 진수가 비록 정사에서 조운별전을 제외했을지 모르나 조운별전을 의식한 기록이 많다. 관장마황조전에 조운을 다른 4명의 상장들과 같이 포함시킨 것과 진수가 조운을 한나라의 개국공신인 [[하후영]]에 비한 것도 그렇다. 당시 조운의 위상이 관장마황에 버금가는 위상인 것도 있고 진수가 조운별전을 의식하지 않았으면 애당초 조운에 대한 상당히 후한 평가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정사 삼국지 조운전에서 조운이 당양 전투에서 필마단기로 감부인과 아두를 구출한 일화가 하후영이 팽성 전투에서 유방의 아들과 딸들을 뛰어난 기마술로 구출한 일화와 비슷하지만, 인물평에 조운이 유비의 조아와도 같은 존재이며 강직하고 용맹한 장수라고 평을 내리는 것을 보면 정사의 내용만 가지고서는 진수가 왜 이런 평을 내렸는지는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다. 진수가 정사 삼국지 편찬 당시 조운별전에 해당하는 기록들을 읽어봤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진수는 정사 삼국지를 너무나 간략하게 써놨기 때문에 꼭 해당 열전에 있었어야 할 내용도 주석을 참고하지 않으면 내용을 알 수 없는 상황도 많다. 가령 정사 삼국지 강유전 본전만 참조하면 강유는 그냥 촉한이 멸망한 후 종회의 선봉이 되었다가 종회의 반란에 위군이 분노해서 종회가 죽었을때 휘말려 최후를 맞이한 것 뿐이다. 그러나 정사에 주석으로 달린 한진춘추, [[화양국지]], 진양추를 참고하면 강유가 종회를 이용해 촉한에 대해 복국을 실행하려고 했으며 그것이 실패하여 죽었고 촉인들이 안타까워 한다는 내용까지 덧붙여진다. 정사 삼국지 본전만 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인데 진수는 이걸 빼놨고, 심지어 원소전에는 아예 원소가 명망을 얻게 된 계기인 6년상에 대한 내용이나 원소가 [[계교 전투]]에서 공손찬을 어떻게 이겼는지, 공손찬과는 어떤식으로 싸웠는지조차 본전에 싣고 있지 않다. 당장 배송지가 주석을 달게 된 계기도 진수의 정사 삼국지 본전이 너무 간략해서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송문제]]의 지적 때문이었다. 진수가 사적을 쓰면서 중요한 내용을 빼놓음이 적지 않음이 많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본전(삼국지 정사)에서 선주가 평원상일 때, 조운은 이미 수종하며 기병을 주관했다. 별전에서 이르길 "원소에게 나아가, 조운은 업에서 만났다." 즉 건안 5년 후에 있는 것이니, 이는 어긋나고 뒤엎는 것이라, 믿을 수 없다. - 하작 또 하북에 있던 조운의 행적을 설명할 때 잠시 언급했듯이 하작의 지적이 틀렸다는 얘기가 있다. 조운별전에 나오는 조운이 유비를 따르게 되는 시기는 조운이 공식적으로 유비를 따르게 된 시기를 말한다. 실제 조운이 유비가 평원상을 지낼 때부터 따랐다면 반드시 서주 관련 기록에도 나와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당시 조운은 공손찬의 부하였다. 그가 마음대로 공손찬을 버리고 유비를 따랐다고 보기 어렵다. 실제 조운별전 기록을 보면 조운은 자신의 형이 죽자 형의 상례를 핑계로 공손찬을 져버리는데 그러면서 바로 유비를 따르면 세상 사람들의 욕을 먹기 때문에 따르지 못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걸 기약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 부분은 딱히 조운을 미화한 부분이 아니다. 형의 상례를 핑계로 조운이 유비가 평원상을 지내던 시절에 공손찬을 버리고 낙향했다는 기록일 뿐이다. 이 기록은 정사 삼국지 조운전에 나오는 유비가 평원상일 때 조운이 기병을 주관했다는 기록의 바로 뒤의 일이므로 어긋나지 않는다. 또한 조운은 유비가 서주를 여포한테 잃고 예주목을 하던 시절에도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하다못해 조운과 버금가는 맹장이면서도 기록이 없어서 비중이 낮은 [[진도(삼국지)|진도]]조차 예주에서부터 유비를 섬겼다고 기록이 나오는 마당이다. 따라서 조운별전 기록은 정사 삼국지 촉서 조운전에 기술되지 않은 부분을 오히려 보충해준다고 볼 수 있다. 하작은 입촉 직후 논공행상에서 조운의 간언으로 당시 여론을 물리친 것에 관해 제갈량이 주관했을 회의에 한낱 무관의 의견을 들어야 할 정도로 논의가 이루어 지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남의 명성을 가로챈 것이라 하거나, 이릉대전 직전 유비를 말린 것에 관해 대전 후 제갈량이 법정을 언급한 것과 제갈근이 유비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이 조운의 논리와 비슷한 것, 조운의 명성이 법정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들어 별전을 쓴 후손이 모방한 것이라 주장했다. 또 1차 북벌 이후의 포상은 제갈량이 상벌에 엄격함을 들어 조운의 미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하작의 의견은 별전은 믿을 수 없는 사료라는 것을 사고의 전반에 깐 상태에서 제갈량의 능력만을 공경하고 조운의 경력이나 능력, 발언권은 지나치게 낮잡아 본다는 문제점이 있다.[* 당장 별전에 의문을 표할 때 제갈량은 제갈공으로 존칭하고 제갈근에게도 자를 붙여 호칭하나 조운에게는 이름값(원문은 호號)이 낮다면서 잡무관 취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제갈량에 대해 평할 때 상벌에 엄정해 아랫사람들이 포상을 바랄 수 없다고 했는데,[* 즉 포상을 내릴 사람이 아닌데 이를 논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제갈량은 법정이 사적제재를 가해 주위의 탄원을 받을 때 유비에게 필요한 인물이라 그럴 수 없다고 하거나 장완이 죄를 지었을 때 구명을 청하는 등 엄정함만으로 정사를 돌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 면만을 보고 다른 면을 보지 못하니 하작의 의견은 중하게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한중 공방전의 [[일신시담]] 일화의 경우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황충은 별개의 작전을 하러 나갔고 조운은 영채를 나갔다가 황충과는 전혀 관계없이 별개의 공을 세웠기에 황충전에 나오지 않았다고 볼 수 있으며 자치통감에서도 이 기록에서 장익과 장저에 관한 기록에 대해서만 배제하고 있다. 즉 이것 역시 배송지가 1차 검증하고 통감이 2차 검증한 셈이 된다. 통감집람에서 의문을 표한 부분은 제갈량이 융중대를 세울 때 오는 원군으로 삼을 수는 있으나, 도모할 수는 없다고 했는데 유비를 막지 못하고 뒤늦게 법정을 추념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 것으로 조운별전 쪽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의문은 위의 유엽이 유비가 오를 칠 것이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오를 공격하는 것으로 유비에게는 관우와의 관계가 융중대나 대의보다 우선이었다는 것을 보였기에 해소 가능한 부분이다. 앞서 촉한에 긍정적인 인사들이 조운별전을 부정적으로 본 것을 언급했는데 어느 국가를 좋아하든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촉한을 좋아해도 유선을 싫어할 수 있고, 위를 좋아해도 조비를 싫어할 수 있으며, 오를 좋아해도 손권을 싫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학자들이 별전에 부정적이 었던 것은 아닌데 별전을 주석으로 추가한 배송지나 자치통감에 실은 사마광, 호삼성 같은 인물들은 별전에 긍정적이었다. 이처럼 별전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게 누군가인가에 따라 별전의 신뢰도가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이 아니니 촉한의 긍정적인 사가들이 부정했으니 신뢰도가 낮다는 주장은 부질없는 이야기다. 정사 삼국지 관장마황조전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에 대한 평이 매우 박한 반면에 황충, 조운에 대한 평은 그냥 찬양 일색이다. 정사 조운전에 내용만 보고서는 왜 진수가 저렇게 찬양 일색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사 기록만 보면 진수가 관장마황조전을 저술할 때 조운별전은 물론이고 해당 장수들에 관련된 별전이나 가전류의 기록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애당초 기록도 없는데 그거라도 참고하지 않으면 아예 평가를 내리는 거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배송지]]가 조운별전을 인용할 때도 그나마 신뢰있는 내용들만 추려서 실은 것이다. 실제로는 저 내용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이나 거의 민간 전설에 가까운 내용들이라 저 내용들만 싣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진수가 정사 삼국지를 편찬할 당시에는 조운별전도 비슷한 시기에 쓰여져서 내용이 훨씬 풍부했을 것이다. 배송지가 인용한 것을 보면 관련 정사와 교차검증해 보면 앞뒤가 맞는 내용이 있다. 형남 공략전, 한중 공방전과 관련한 조운의 처신과 전공은 딱 봐도 사실로 보인다. 자치통감 같은 기록에서는 하작이 비판한 키같은 내용은 배제하고 북산에서의 활약 등 하작이 비판하지 않았던 기록들을 참조한 부분이 꽤 있다. 게다가 조운별전의 기록중 배송지가 자신도 못 믿겠다고 말한 부분은 없다는 점도 중요하다. 되도 않은 내용이었으면 배송지가 아예 참고하지 않았을 테고 뻥카로 보기엔 세세한 부분이 많아서 전부 지어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단적으로 조운별전에서 조운이 편장군이 된 시기나 형남 정벌 관련 내용을 보면 앞뒤가 맞는다. 조운별전을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별전이 연의식으로 조운의 무공을 과장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오히려 이들의 주장이 더 과장된 것이다. 조운별전에서 조운의 무공을 강조하는 것은 한중공방전의 일신시담 일화와 1차 북벌에서 손수 뒤를 막아 피해를 줄였다는 부분 뿐이고 심지어 별전에서 묘사한 장판파에서 유선을 구출한 부분은 무슨 연의에서 나온것처럼 조운이 호표기 다 박살내고 아두를 구해왔다는 내용이 아니라 유비의 신임을 강조하는 부분에 불과하다. 일신시담 일화는 하후연을 참살한 황충과 함께 유비의 조아로까지 평가받았던 조운이라면 충분히 있을법한 군공이고 손수 뒤를 막아 피해를 줄였다는 부분은 본전에서도 조운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굳게 지키어 대패에 이르지 않았다라는 기록과 합치된다. 오히려 배송지와 자치통감이 인용한 별전의 부분은 언급했듯이 조운의 인품, 군주의 신임, 조운의 정치 부분에 대한 설명을 주로 하고 있다. 이걸 가지고 별전에서 조운의 군공이 연의만큼 과장되었네 주장하는것은 오히려 연의의 시각 때문에 조운별전에 편견을 가진 것이라고 밖엔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도 조운별전 부분에 별전 비판에 대한 내용을 실었지만 해당 문단 말미에 >그러나 이러한 류의 관점은 다수가 아니며 일부 사학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의고한다고 지적받고 있다. >「然而,此類觀點並不多見考,並被一些史學者指過分疑古」 라는 내용으로 마무리했다. 조운이 무관이 아니라 문관이었다는 비판도 조운별전을 통해 나온 것이다. 조운별전을 무작정 부정하면 자신들이 조운별전에서 인용한 사료도 전부 부정해야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