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운 (문단 편집) === [[공손찬]] 휘하에서 === [[원소(삼국지)|원소]]가 책략을 사용하여 [[한복(삼국지)|한복]]에게서 기주를 뺏자, 따르는 자들[* 본문에는 의종(義從)이라 적고 있다.]을 거느리고 [[공손찬]] 휘하로 들어갔다. 공손찬은 기주인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걱정하던 도중에 조운이 귀부해 온 것에 기뻐하여 조운을 놀리며 말했다. >듣기로 기주 사람들은 모두 원씨(袁氏)를 원한다던데 그대는 어찌 홀로 마음을 돌리고 미혹되어 이에 반(反)하는 것이오? 조운이 답했다. >천하가 흉흉(=술렁거리어 매우 어수선하다.)하여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으나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리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여 비주(鄙州=자신의 주를 겸칭)에서 논의하기를 어진 정치가 있는 곳을 따르기로 하였으니, 그런 뜻에서 귀부한 것일 뿐 원공(袁公)을 소홀히 하거나 명장군(明將軍)을 사사로이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자치통감은 '원공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밝으신 장군께 사사롭게 따르는것 입니다.'라고 하고 있다. 현대의 자치통감은 '不爲忽袁公,私明將軍也' 라고 반점을 붙이고 현대의 정사 삼국지는 '不爲忽袁公私明將軍也' 라고 반점을 붙이지 않아 생기는 현상이다.][* 물론 이 당시 공손찬이 굉장히 잘난 인물이기는 했어도 어진 정치로 소문난 것은 아니었으니, 기본적으로는 한복을 내쫓고 기주를 날로 먹은 원소에 대한 반발심이 꽤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공손찬과 함께 전투에 나선다. 당시 [[유비]] 또한 공손찬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평원에서 전해와 함께 원소를 막으니 조운은 유비를 위해 기병을 지휘했다. 조운이 기병 지휘관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공손찬 시절 조운이 잠깐 유비를 따라 전장에 나갈 때로 당시 조운은 공손찬의 정식부하가 아니라 의병이었다. 이렇게 유비가 늘 조운을 접납(接納)하니 조운이 심히 유비와 결탁하게 되었다. 이후 형이 죽자 공손찬에게 이를 고하고 낙향했는데, 그가 장례를 핑계로 공손찬으로부터 떠나려는 것임을 직감한 유비와 손을 맞잡으며 애틋하게 작별했다. 조운은 "끝내 덕(德)을 저버리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훗날을 기약했다.[* 193년 6월경 원소,여포 연합군이 조운의 고향인 기주 상산에 주둔한 장연을 쳐서 대규모 싸움이 일어난다. 공손찬의 막장화와 더불어 조운이 고향으로 돌아갈 이유는 충분했던 셈이다. 유비도 서주 구원을 핑계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 공손찬과 갈라서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