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운 (문단 편집) === [[유비]]의 입촉 === || 유비가 가맹(葭萌)에서 환군해 유장을 공격하고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이 조운과 장비 등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도착하자 조운을 나누어 보내 외수(外水)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게 하니 [[청두|성도]]에서 제갈량과 합류했다. 성도가 평정된 뒤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 조운전 || 흔히 조운이 일군을 이끌고 군을 운용한것이 1차북벌 때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공식적으로 조운이 따로 부대를 이끌고 군사를 운용한 것이 확인되는 기록은 익주정벌전이다.[* 형남 4군 정벌때는 제갈량의 명을 받아 움직였는지 본인이 이처럼 일군을 이끌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제갈량의 본대는 장비와 함께 했고(장비전), 조운은 물길(물이 있는 곳엔 언제나 점령지가 있듯이 점령전엔 물길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을 따라 제갈량의 본대와 따로이 다른 부대를 운용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정사의 기록에서는 성도 평정 이후 어느 시점에 익군장군이 된 것으로 나오는데, 화양국지에서는 이를 219년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하후연 전사 후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한중에 왔을 때 조운을 익군장군이라고 명시한다. 조조가 완전히 물러간 후 한중왕에 올랐으므로 시기상으로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익군장군의 시기에 대한 시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정사 조운전 : 익주 평정 이후 어느 시점인 214년부터 219년 봄까지. 혹은 정남장군이 된 223년 이전까지도 가능하다. >2) 자치통감 : 조조의 한중 참전 전후로 최소 219년 봄 이전. 이 경우도 망라 기간이 길다. >3) 화양국지 : 유비 한중왕 등극에 맞춘 219년. 다만 유비가 219년 한중왕에 즉위하면서 대대적인 개편과 승진이 일어났으니 아마 화양국지의 명시가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여기서 익군장군은 기존에 없는 장군직이며, 후대에도 쓰이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그 정체가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다. 익군장군과 관련하여 주목해 볼만한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자면, 먼저 익군장군은 유비가 생전에 직접 만든 두 가지 장군직(제갈량의 군사장군과 조운의 익군장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장합, 하후연, 조조로 이어지는 위군과의 전투가 일어난 시기이다. 익군장군의 대략적인 역할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잡호장군이었다는 것이다. 잡호장군의 특성상 익군(翊軍), 즉 군을 돕는, 군을 보조하는 역할이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익(翊)의 특성상 본대 중앙군 기준으로 좌우익에 해당하는 위치였을 수도 있다. 혹은 익주를 장악하고 국정에 집중해야 했던 유비가 수족이자 그림자로서 움직여줄 조운을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 주었을 수도 있다. 한편, 익군장군의 모델이 전한의 익군교위라는 설이 있다. 익군교위는 남군 소속으로 황궁 수비를 전담하는 관직이었으며, 황궁 문들을 숙위하는 병사들의 지휘관이었고 전한대에는 사성교위와 동급, 장수교위의 상급, 사예교위 아래였다고 한다. 이 익군교위를 업그레이드 해서 익군장군이 되었고, 이 역할이 대충 군주 유비의 직속부대의 지휘관이라는 설이다. 별전에 의하면 그 유명한 [[일신시담]] 사건 당시, 유비가 조운의 진영을 '''시찰'''했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찰이라는 표현이 꽤나 의미심장하다. 익군교위를 업그레이드 시켰을 거라는 점은 추측이며, 기록에서 아무런 연관 관계를 찾을 수 없고, 또 익군교위 자체가 전한 시대에 사용되고 후한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데, 유비가 굳이 전한대의 익군교위를 끌어다가 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도 의문이며, 이미 전한대에서 사라진 익군교위를 알고 있었을 지도 의문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후일 [[서진]]에서는 [[팔왕의 난]] 당시 제왕 [[사마경]]이 익군교위를 지냈고, [[성한]]에서는 태자 [[이세]]가 익군장군을 지냈다고 하니 익군교위직을 후대에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조운 이후로 촉에서는 [[곽익]] 정도만 임명되었을 정도로 익군장군은 임시직의 성향이 보이는데, 심지어 곽익의 익군장군 때도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모호하다. 참고로 조운이 익군장군이던 시기에 관우는 전장군, 마초는 좌장군, 장비는 우장군, 황충은 후장군에 임명되었다.[* 사방장군의 서열은 마초가 받은 좌장군이 가장 위이나 관우는 마초와 장비가 받은 가절보다 한 단계 위인 가절월을 받아서 그 위치를 차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관장마황은 모두 어깨에 힘좀 줄 수 있는 요직으로 임명되었는데 조운은 임시직 성향이 짙은 익군장군에 임명된 것이 그의 능력이 생각보다 특출나지 않았다거나, 전공이 다른 이들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에 중용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조운 평가 절하의 한 가지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저평가의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게 따지면 제갈량의 군사장군도 유비가 만든 임시직이기 때문이다.[*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에 오르기 전 조정에서 정식으로 받은 관직이 좌장군이다. 좌장군 밑의 군사장군은 좌장군부의 사무를 총괄하는 직책으로 단순 서열론 안한장군 미축, 소덕장군 간옹과 낮거나 비슷하지만 실권에선 비교도 안되는 실세중의 실세였다.] 유비가 장군직을 만들어 줄 때는 그만한 이유와 중요도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반대로 임시직 성향이 짙기 때문에 시국에 비추어 봤을 때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보는게 맞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임시적인 성향이 짙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다. 임시직이 괜히 임시직인가? 평시보다 위기에 필요하기 때문에 임시직인 것이다. 조운의 쓰임새가 애매했다면 그냥 애매한 장군직을 주지, 굳이 없는 장군직을 새로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시기적으로 봤을 때에도 익주가 평정된 지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며, 한중왕 즉위 이후였기 때문에 세력 내 융합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또 이 시기는 위의 대대적인 침공과 겹치는 기간이다. 따라서, 그런 시기에 유비가 최측근인 조운에게 맡긴 것이 익군장군이기 때문에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운의 익군장군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운의 위치와 영향력, 행적 등을 고려해보았을 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찮게 여길만한 것이 결코 아니다. 조운은 무장이면서도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유비의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익군장군은 유비가 조운에게 맡기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서 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익군장군이라는 장군직 자체의 품계나 역할보다도 오히려 조운이 임명되었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중국 쪽에서는 설문해자의 뜻에 부응해서 翊은 翼과 통한다고 하여, 유비가 조운을 자신의 날개, 즉 左膀右臂 심복으로 본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데 문제는 이 시점에서 조운의 위치다. 조운은 이미 유비의 형주 시절에 편장군 계양태수로 유비군의 엄연한 중진이었다. 관우, 장비만은 못해도 고참장군인데다, 밑에서 나오지만 익주 점령 후 유비의 전후 정책에 간언을 해서 그 방향을 바꿀 정도로 유비와의 관계도 가까운 편이다. 마초는 이 시점에서 유비의 객장인만큼 별개의 존재, 그리고 유비는 이 시점에서 좌장군이었기 때문에 좌장군부의 장사/사마/종사가 그 뒤를 따르고, 군사장군 제갈량을 대표로 하는 좌장군 휘하 부곡장(잡호장군)들이 그 뒤를 잇는다. 제갈량의 경우 유비가 특별히 좌장군부의 사무를 보도록 창설한 장군직에 있으니 부곡장이라고는 해도 좌장군부의 사무는 장사/사마/종사를 넘어서는 권한을 행사하지만. || 평서장군 도정후 신 '''마초''', 좌장군 장사 영 진군장군 신 허정, 영사마 신 방희, 의조종사중랑 군의중랑장 신 사원, 군사장군 신 제갈량, 탕구장군 한수정후 신 '''관우''', 정로장군 신정후 신 '''장비''', 정서장군 신 '''황충''', 진원장군 신 뇌공, 양무장군 신 법정, 흥업장군 신 이엄 등이 120인이 상언합니다. - 선주전 || 그런데 여기서, 조운 외에도 꼭 들어가야 할 사람이 빠져 있다. 장군중랑장 [[동화(삼국지)|동화]]다. 동화는 유비의 익주 평정 후 장군중랑장으로 임명되어 제갈량과 함께 좌장군 대사마부의 사무를 맡아보게 된다. 유비는 익주에 들어가면서 유장의 표문으로 대사마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제갈량은 유비의 공식 관직인 좌장군부의 사무를 맡고, 동화는 유비의 최고위 관직인 대사마부의 사무를 맡은 것이다(화양국지 유선주지). 이런 인물이 빠져 있다. 생몰이 분명치 않은 만큼 유비의 한중왕 선언 이전 죽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화의 후임이 누군지도 분명하지 않고, 제갈량의 소회에 따르면 동화는 관직에 몸담은 것이 20년, 제갈량과 함께 일한 것이 7년이라고 하고, 제갈량은 동화의 비중을 무척 크게 보고 있다. 이 시점에서도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도 유비의 제위 등극 전에 사망했다고 봐야겠지만. 만약 동화가 살아있었음에도 이 표에서 그 서열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것도 문제가 있을 터다. 유비는 분명히 좌장군과 대사마의 사무를 제갈량과 동화에게 각각 맡겼는데, 이 한중왕 표문에서는 대사마 직할 관원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으니까. 때문에 이것과 연관지어서, 조운의 관직을 설명할 수도 있다. 유비는 한중왕이 될 당시 대사마 한중왕을 칭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좌장군으로서 이에 오르는 형식을 취했다. '좌장군 영사례교위 예형익삼주목'이 이 표문에서의 유비의 직함이다. 유비는 그러니까 자신이 칭했던 직함들 중,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공식 직책인 좌장군 이하의 지위에 있는 직함들만 붙인 셈. 마초의 평서장군이나 황충의 정서장군 같은 것도 실질적으로는 잡호장군이고, 사평/사정으로 봐도 좌장군 이하니까 모양에 손색은 없다. 요컨대, 유비는 한중왕이 되기 위한 절차를 밟으면서, 좌장군의 재량으로 임명할 수 있는 관직 내지는 좌장군 이하의 군직들만 전면에 내세우고 대사마부의 관리나, 금군 관련 직책들은 잘라낸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조정(황제)의 권위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퍼포먼스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운의 익군장군이 익군교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조금 생긴다. 조운이나 동화는 유비의 입장에서 볼때, 월권으로 임명한 직책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와는 별개로, 익군장군이라는 장군직이 설치된 뒤, 그 의미가 근위군의 장군 내지는 상당한 권위를 지닌 장군으로 변해갔을 공산은 충분하다. 익군교위라는 유사 직책이 있고(한자도 똑같으니), 나중 일이지만 촉한 말년에 곽익이 익군장군으로 임명되는데, 호군 내강둔부이도독(내강도독?)과 영창태수로 임명된 뒤에 감군/익군장군으로 '승진'하고 다시 건녕태수를 겸임하는 것으로 나온다. 촉 당대에 이미 익군장군 자체가 결코 한직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 익주가 평정된 뒤 당시 사람들이 의논하여 성도의 옥사(屋舍)와 성 바깥의 과수원, 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했다. 조운이 이를 반대하며 말했다. "([[무제(전한)|한무제]]가 집을 하사하자) [[곽거병]]은 [[흉노]]를 아직 멸하지 못했으니 집이 쓸모없다고 하였는데 또한 나라의 적이 비단 흉노만이 아니니 아직 안락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천하가 모두 평정될 때를 기다려(須天下都定), 각자 고향로 되돌아가(各反桑梓)[* 호삼성은 자치통감 주석에 이렇게 적었다. '도정(都定)은, 모두 평정함을 말하는 것과 같다. 상재(桑梓, [[뽕나무]]와 [[가래나무]])는, 고향에 조부가 심은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에서 이르길 오직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하는 게 예의다.(維桑與梓, 必恭敬止.)'라고 했다. 즉 호삼성은 조운이 시경을 인용해 이 주장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본래 땅에서 농사짓는 것이 마땅합니다. 익주(益州)의 인민(人民)들은 처음 전란을 겪었으니 논밭과 집들을 모두 되돌려주고 이제 이에 안거(安居)하며 생업에 복귀하게 한 뒤에 부역하게 하고 조(調)를 거둔다면 그들의 환심(歡心)을 얻을 것입니다." 이에 [[유비|선주]]가 이를 따랐다. - 조운별전 || 익주가 평정된 이후에 조운이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 발언권을 강력하게 어필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여기서 조운은 주목할 만하게도 성도의 토지를 하사하는 문제와 관련해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여 그 뜻을 관철시킬 정도로 영향력이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발언권은 '''중요한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 대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뒤집을 수 있을 만큼의 발언권'''이다. 익주 평정 후 성도 내의 주택, 과수원, 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누어주려는 회의에서 조운은 '''반대'''하며, 유비가 이를 따르면서 마무리 된다. 이 일화는 보통 조운의 강직함과 공정함, 대국적인 안목[* 전란 이전 농촌경제와 호구를 살리고 주군의 농업경제 육성과 발전을 꾀하여 그들의 생업을 보장케하는것이 국가의 재정을 늘리고 호구파악을 편하게 하며 민심획득에 이익이라는 뜻.], 사리사욕과 거리가 먼 성격 등과 관련되어 인용되곤 하지만, 사실 조운이 가진 엄청난 입지와 실질적인 영향력을 보여준다. 회의 자체가 제장들에게 상으로 나누어주려는 회의였고, 자치통감에 의하면 '''논의에 참여한 사람들 중 대다수가''' 그것을 상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조운의 발언은 반대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대부분의 제장들의 의견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었을 것이며, 이는 실제로 그 혜택을 볼 다른 회의 참가자들에게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비는 조운의 주장을 받아들이는데, 이는 분명 조운의 발언권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발언을 혼자서 했음에도 직접적으로 불만을 내비친 신하가 없었다는 건 조운의 유비 세력 내부에서 입지와 발언권이 일정 이상이라는 증거이자 조운이 사리사욕이 아닌 공명정대함을 내세우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보면, 익주의 중심지인 성도의 주택, 그리고 과수원, 뽕밭을 나누어주는 것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인 것이다. 이것 자체가 주거지, 토지, 경제인데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뽕나무]]는 당시에 익주를 부자 동네로 만들어주는, 부의 근원이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일단 뽕나무의 열매는 오디라고 하여 식용으로 쓰이며, 약재로도 쓰인다. 또 나무는 가구 재료로 활용된다. 가장 중요한 쓰임새로 잎이 누에의 사료로 사용되는데, 비단이 핵심 수출품이었던 익주 입장에서 봤을 때 뽕나무가 부의 근원이라는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뽕나무는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버릴 게 없이 모두 활용되는 촉 경제의 근간이었다.[* 조선만 봐도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누에를 치는 친잠례가 연례 행사였고, 1970년대까지도 잠업은 농업부문의 핵심 국책사업이었다.] 이것을 익주의 백성들에게서 빼앗아 공을 세운 제장들에게 나누어 줄 경우 유비의 중신들이 촉의 지주이면서 동시에 재벌이 되는 것인데, 이는 익주의 경제 체제를 흔들어버릴 수 있는 문제였다. 유비의 신하들에게 있어서 사리를 채우는게 나쁠 것이 없으니 대부분 동조했다는 건 이상할 것이 없는 문제다.[* 유비는 익주를 얻기까지 꽤나 고생을 했으며 방통을 비롯한 여러 부하들도 잃었으니 고생해서 살아남은 부하들에게 보상하고 싶었겠고, 신하들도 대부분 그런 보상을 받고픈 마음이 있었으리라. 다만 유비가 조운의 말을 들은 것은 조운의 조언이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맞는 발언이라고 생각했고 그만큼 조운과 의견의 일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역으로 익주민들의 민심을 달래야 하는 유비 입장에서 주요 장수들, 심지어 정사피셜 친형제와도 같다는 관장조차 차마 불만을 내비칠 수 없는 확실한 행동대장으로 조운을 지목해 시나리오를 짰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그만큼 유비 진영에서 조운의 입지와 유비의 신뢰가 드높다는 사실을 이 사건 하나로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조운은 이런 상황에서 홀로 정면으로 배치되는 의견을 내고 군주의 최종 동의를 얻어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과 발언권,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