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운선 (문단 편집) === 조선 시대 === [[파일:external/m.seoul.go.kr/20130130133510.jpg|width=400]] 각선도본에 실린 조선시대 삽화. 배를 통한 조운제도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말선초 왜구의 침략 상황은 역으로 조운제도 개선과 발전을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로 이어진다. 이 시기에는 조창 방어용 성곽인 조전성이 발전한다. 또 고려시대 선체는 선체 중앙에 1개의 돛을 설치한 구조였으나, 태안군에서 발굴된 조선 초기 조운선의 구조를 보면 조선 초 조운선은 앞쪽과 중앙에 각각 돛을 설치하는 형태로 바뀌고 쇠못을 사용하는 등 내구도가 올라갔다. 조선 초에는 국가에서 조운선을 만들고 관리했다. 조운에 동원된 조졸의 정원만 5960명이었다. 각 조창에서는 수확기부터 겨울까지 세곡을 거둬들여 보관하고, 조운선은 대체로 2월부터 5월 사이 날씨가 순한 날을 골라 항해를 시작했다.[* 날씨에 따라 6월에 출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꼭 5월, 6월, 7월에는 조운선이 수십 척씩 바다에 침몰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자주 올라온다. 특히 경상도로 가는 길이 험하여 경상도에 가는 배는 자주 침몰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멀리까지 조운선을 타야하는 조군들은 목숨이 아까워 기회를 보다 도망가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하필 이때 태풍이 오는 일도 많았으니 파선도 흔했다. 그런데 이 조운선은 제작비도 높지만 유지비도 많이 들었다. 만든지 3년이 지나면 배를 결합하는 목전이나 노, 키 등의 삭은 부분을 다 보수해주어야 했고, 또 3년이 지나면 재보수 및 부품 교체, 총 9년이 지나면 아예 배 자체를 개조해야 했다. 이 과정에 목재가 어마어마하게 든다고 신하들부터 국왕까지 모두 한탄할 지경이었다. 이런 문제가 심화된 이유 중에는 조선에서 배 만들던 장공인들의 처우 문제도 있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 배를 만드는 장공인 뿐 아니라 조선의 모든 장공인은 공역으로 일년 중 3분의 1을 출역했는데 이 제도가 조선의 민간 기술자들의 기술을 쇠퇴시키거나 그 인구 자체를 대폭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배를 만드는 것은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한 고급 작업이었지만 이 일에 동원된 장공인들은 임금을 아예 받지 못하거나 콩 한 줌 정도를 받았고, 처우도 나빴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관원들과의 갈등도 심했다. 그 결과 조선 중기에 가면 민간의 배가 관선보다 튼튼해지는 상황이 온다.[* <[[표해록]]> 중 민간의 좋은 배가 나라의 배보다 좋다고 언급된다.] 조선 후기에 가면 도고 상업이 발달하고 민간자본 및 무역업이 발달하면서 국가가 직접 모든 배를 만들고 관리하는 대신 민간에 상당수를 위탁하게 된다. 조선 중후기 상업의 발달, 경강상인의 등장 등으로 민간 선박의 성능이 크게 향샹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국가 소유의 배는 그 수가 줄어들어서 국가는 병선과 조운선을 서로 통용해서 쓰게 되는 등, 점점 조운선을 생산하고 운영하는 기능을 잃어간다. 조운에 동원되는 인원도 기존에는 나라에서 조졸[* 조운업을 전담한 선원들로 세습직으로 조운업 외에 다른 일에 동원되지는 않았으나, 신분은 양인이면서 천시되던 신량역천중 하나였다.]을 동원하던 것이 숙종 30년을 기점으로 나라에서 임노동자를 고용하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조선 후기로 가며 [[대동법]]이 생겨 모든 공물을 쌀로 받게 되면서 수송량은 더욱 늘게 되는데 여기 전용할 조운선 및 군선 부족 문제가 가속화되면서 관영 조운제의 쇠퇴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되고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사선임운은 해악이라며, 어떻게든 국가 주도의 조운제 및 조운선 건조 복구를 주장했지만, 미곡의 선운량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민간 동원을 뺄 수가 없었다. 조운에 참여한 경강상인들은 초기엔 퇴병선을 사들여 쓸만하게 다시 개조하여 참여했고 나중엔 도고 행위로 모은 부를 통해 목재를 구입해 직접 선박을 건조하기도 했다. 경강상인들은 이 과정에 세곡을 빼돌려 큰 부를 축적하게 된다. 참고로 조선시대의 해난사고 중 상당수는 탈세 및 횡령이었는데, 텅 빈 폐급 조운선을 몰고 나가서 침몰시킨 다음 "침몰해서 쌀 없어졌음" 하는 레퍼토리였다. 더구나 상인들이 조운을 맡았으니 운반곡을 착복하는 '투식', 선박을 침몰시키는 '고패'등의 부정행위는 점점 더 자주 행해져 조세 수입이 감소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물론 조선 후기에도 어떻게든 관영 조운업의 비중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이어졌다. 그러나 조운선을 더 만드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에, 주로 병선을 조운선으로 쓰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였다. 예를 들어 병선을 건조할 때 본판에 나무를 더 붙여서 넓이를 증가시키는 식으로 하여 전쟁 시와 조운 시에 모두 쓰기 편하게 하자든지, 2백 석밖에 싣지 못하는 기존의 병선을 길이를 7파에서 8파로, 넓이를 1파 반에서 3파로, 높이를 1파 반에서 2파로 고쳐 5백 석 적재가 가능하게 개선하자는 식이었다. 다만 이러한 논의는 실제 행해지는 데까진 이르지 않았으므로 관영 조운업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근대에 서구의 운송 시스템과 조세제도가 도입되어 정착하기 전까지 조운선과 조운 제도는 조선의 국가경제를 책임지는 핵심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외에도 조운선은 배가 둔중하고 튼튼해 아래 소개할 군용선인 맹선으로도 쓰였고, 국왕의 행차시 배다리를 만드는 데에도 쓰였다. 이 조운선은 북부지방에서 사용하는 것과 중남부 지역에서 쓰는 것이 조금 달랐는데, 북부 지역에서 쓰는 것은 북조선(北漕船)이라고 불렀다. 북조선은 일반 조운선보다 뱃전이 조금 낮은 대신 배가 더 넓어 보통 조운선이 800~1,000석을 수송하는 데 반해 1,000~1,200석의 곡식을 나를 수 있었으며, 북조선은 서울이 아닌 함흥 별궁에 북부지역의 세곡을 모아놓고 북방지역의 재정에 사용했다. 조선시대 북부지방은 세곡을 서울로 가져오지 않고 그 지역에서 사용하는 지역이었는데, 그 북부의 세곡을 관리하는 별궁으로 수송하는 것이 북조선이었다. 화륜선처럼 수차로 움직이는 윤선 조운선을 조선시대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http://sillok.history.go.kr/id/kma_10502025_001|남아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유럽에서도 증기기관 등장 이전에는 기술적 문제로 항해용으로는 잘 쓰이지 않았던지라 해로를 사용하는 조운선의 특성상 얼마나 쓰였을지는 의문이다. 개항 이후인 1880년대부터는 서양식 [[기선]]들이 속속 도입되었다. 이때부터 외국계 해운업체는 물론이고 조선/대한제국 정부, 조선의 상인들 역시 기선으로 물품을 운송하면서, 전통적 조운선의 시대는 끝을 맞이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