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참 (문단 편집) === 제나라의 상국 === 소하와의 비교에서는 굴욕을 당하긴 했지만(……) 조참은 그 후에도 활약을 멈추지 않았다. [[진희(한나라)|진희]](秦稀)가 반란을 일으킬 때는 진희의 장수 장춘(張春)을 격파했고, [[영포|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제나라 상국의 신분으로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전한)|유비]](劉肥)의 '''12만'''의 원정군을 이끌고 유방과 합류하여 [[영포|경포]]를 박살내었다. 그리하여 평생 동안 2개의 제후국을 무너뜨리고, 122개 현을 평정하거나 점령했으며, 제후왕 2명[* 조헐과 경포], 제후국의 상국 3명, 장군 6명, 대막오(大莫敖), 군수(郡守), 사마(司馬), 후(侯), 어사(御使) 각 1명씩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고 한다. [[혜제(전한)|혜제]] 시절인 BC 192년에는 제후국에 상국을 두는 법이 폐지되어 제나라의 승상이 되었다. 이때 제나라 관할의 성읍은 70여 개가 넘었는데, 전쟁이 막 끝난 뒤인 데다 제도혜왕 유비는 나이가 어려 여러가지로 나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이에 조참은 사람들의 조언을 들으려고 학자들을 불러모았지만, 말하는 학자들마다 서로 "이거해라, 저거해라."라는 등 중구난방이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교서(膠西)의 개공(蓋公)이라는 인물이 학식이 깊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예물을 두고 초청했다. 개공은 이런 의견을 내었다. >"치도(治道)의 가장 좋은 방법은 청정무위(淸淨無爲)로써,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스스로를 안정시킬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참은 그러한 황로학파(黃老學派)의 학술로 제나라를 다스려 효과를 보았고 사람들은 조참이 현명한 재상이라고 칭찬하였다. 이후 조참은 이러한 무위지치의 정치를 계속 유지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