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총 (문단 편집) === 순발식 === || {{{#!wiki style="margin: -5px -10px -5px" [[파일:Istinggar_Melayu musket snap matchlock musket.jpg|width=100%]]}}} || || '''아시아에 전파되는 순발식 조총의 원류인 동남아시아의 이스팅가''' || Snap matchlock. 또 다른 화승총 격발 방식인 "Snaplock"과 혼동하지 말자. 순발식은 한국, 중국 남방, 일본, 베트남, 남아시아 등지에서 주로 쓰였던 격발 방식이다. 총기 매커니즘으로써의 순발식이야 유럽에서 개발한 뒤 세계 각지에서 쓰였지만, 그 중에서도 여기서 언급하는 동아시아 '순발식 화승총'들의 직접적인 공통 기원은 [[포르투갈]]의 지배 하에 있던 [[믈라카]]의 [[말레이인]]들과 [[고아(인도)|고아]]의 [[인도인]]들이 포르투갈군의 [[아퀘버스]]를 독자적으로 개량한 '이스팅가(Istinggar)' 총이다. 서양인들이 들어오기 전에도 남아시아, 특히 동남아시아 말레이 군도의 국가들은 발전한 화약 기술과 초보적인 총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 중 [[마자파힛 제국]]같은 경우 건국 과정에서 [[쿠빌라이 칸]]의 몽골 제국군을 섬멸하고 건국한 국가였다. 그들은 몽골을 통해 접한 화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인도네시아의 해상 패권을 쥐었으며, 제국의 중심지인 [[자바 섬]]에 거대한 화기 생산 시설을 건설하였다. 마자파힛이 몰락한 이후 주변 지역으로 화기 기술자들이 이탈하면서, 수마트라 등 인도네시아 군도 전역에 화기가 전파되었다. 그리고 [[16세기]]부터 아시아로 진출해 각지에서 교역 거점들을 마련한 [[포르투갈인]]들이 서양의 총기 기술을 들여오고 현지인 기술자들에게 화기 생산을 의뢰하면서, 포르투갈 세력권 각지의 화기 기술이 결합되었다. 고아의 [[인도인]] 기술자들은 좁고 흔들림이 많은 선상에서 사용이 편리하도록 [[화승총|아퀘버스]]의 무게와 구경을 줄였고, 거추장스러운 개머리판도 없애 권총 손잡이만한 부분만 남겨놓았다. 그리고 이를 이어받은 믈라카의 [[말레이인]]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쓰던 방아쇠압이 낮은 순발식 격발 기구를 장착했다. 이것이 바로 이스팅가 총이다. 포르투갈 선원들은 곧 선상전투에 적합한 이 총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주력 무기로 채택하고 [[동북아시아]]로 북상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와 당시 [[센고쿠 시대]]였던 [[일본]]으로도 총이 전파되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으로도 도입되어 조총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후 조총은 국가별로 각자의 분화와 발전이 이루어졌는데, 각 국가별 발전상은 다음과 같다. * '''조선'''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침공하면서 전파되었다. 패색이 짙었던 전쟁 초기에 조총의 위력을 실감했던 조선은, 노획한 일본군의 조총을 분해해보고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1593년부터 조총을 생산했다. 전후에도 조총은 조선군의 표준무기로 서서히 자리매김해나갔고, [[천보총]]과 [[대조총]] 등 다양한 종류의 바리에이션이 생산되기도 했다. 한편, 조선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얀 야너스 벨테브레(박연)]]과 같이 표류한 [[네덜란드인]]들을 통해 방수 기능을 도입하거나 찬혈과 같은 천공법을 적용해 성능을 높이면서도 가격을 낮추었다. [[명청교체기]] 이후 시대에 많은 수의 조총을 청나라로 수출하기도 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에도 널리 보급되었으며, 동네 사냥꾼 포수는 물론이고 일반 농민 가정도 장만하기도 했다. * '''중국''' 화약 최초 운용국으로서, [[명청교체기]]까지는 아시아 각국 군 전투병력 중 조총 병과 비율이 가장 높은 군대인 만큼, 당대 세계 각지의 온갖 화승총들을 도입했으며 당연히 순발식, 지완식 화승총들도 다 운용했다. 이스팅가 순발식 조총은 1522년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접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런 다양한 총들을 그냥 조총이라고 뭉뚱그렸지만 명나라 화기기술자 조사정은 이를 세부적으로 소서양총과 일본총으로 구분했다. 소서양총은 [[마카오]]에 온 포르투갈인들을 통해 직접 접한 선상용 이스팅가를 의미하며, 일본총은 말 그대로 [[왜구]]를 통해 접한 일본 조총을 의미한다. 둘은 거의 같았지만, 조사정은 소서양총이 구조상 좀 더 간단하다며 비교적 더 높은 평가를 내렸다. 반면 일본총은 소서양총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잡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중국에서는 순발식보다는 후술할 루미 계열 지발식 총이 더 널리 보급된다. * '''일본''' 일본은 전국시대부터 [[사무라이]]들이 (나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포르투갈]] 상인에 내외국민 아녀자들을 노예로 팔아 [* 가라유키상의 원류가 16세기초에 이미 기록되었다. 조총을 원하던 아프리카 군벌들처럼 자국민을 서양 노예상에 파는 수단 외에 아예 해외에 일본인 포주들이 일본 여성을 끌고와 성매매업소 차려서 전쟁자금으로써 외화벌이를 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시대에 조총으로 명성을 떨칠 수 있던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각 지방에서 너도나도 따라하는 열풍이 시작되었다.] 조총을 입수하다가 수요가 커지자 자체 개발에 착수한다. 1544년 8월 25일 [[다네가섬]]에 도착한 포르투갈인들을 통해 조총을 도입했다고 흔히들 오해하는데, 이게 모든 일본 조총의 원류가 아니라 단지 유명한 조총 산지에 불과하며, 200년 동안 내전을 겪는 것만 당장의 수요가 커서 수입도 많이 했다. [* 전쟁한다고 세율이 주변국의 3배인 60~80% 수준으로 높아,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마비키|일본 여자들은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판단 되면 죽인다.]]"라고 기록 하던 시대였다. 최대한 빨리 많은 수의 조총을 한 자루라도 더 얻어서 서로 정복하던 때였다. 일부 만들던 일부 수입하던 닥치는 대로 다 갖다 썼다.] 이후 전국시대 후반기에 여러 전투를 거치며 발전시켰다. [[12사도(총기)|조입]]이란 장구류를 개발해 사격 절차를 간소화하고 구경과 장약량에 따라 세 개로 급을 구분했으며 이외에도 오오즈츠를 비롯한 대형총을 만들어 야전에서의 화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순발식 이스팅가 조총은 1900년 정도까지 쓴다. * '''남아시아''' 이스팅가 조총 개발지인 남아시아에서도 인도의 [[비자야나가르 왕국]]과 동남아시아의 시암, 베트남, 수마트라 국가들, 미얀마 등 여러 국가들에서 사용했다. * '''인도네시아 군도''' 이스팅가도 인도네시아 군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섬 지방에서 계속 사용하였다. 마자파힛의 잔여 세력이 남아있는 [[발리 섬]]이 화기 생산 중심지였다. 그러나 동남아시아 섬 지역의 전투 방식에서 화기는 보조 수단이었다. * '''[[베트남]]''' 베트남산 총은 성능이 매우 좋고 형태에서 일부 차이가 있어, 중국에서는 조총이 아닌 교지총[* '교지'는 [[교지(명)|명나라 지배기의 베트남]]을 말한다. 후에 프랑스도 이 단어를 받아들여 베트남 남부를 [[코친차이나]]란 이름으로 지배했다.]이라는 별도 이름으로 부르며 수입해갔다. 교지총은 손잡이 부분이 개머리판 마냥 길었던 게 특징인데, 다른 총들에 비해 명중률과 화력이 매우 강력해 갑주를 한번에 여러개씩 뚫거나 한 발로 두 명을 사살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명나라도 베트남과 접한 [[광서성]] 지역의 국경분쟁에서 교지총의 위력을 경험했고, 하술할 루미총 보다도 좋은 '천하 제일'이라 높게 평가하며 [[광시성|양]][[광둥성|광]] 지역에서 주둔한 랑병[* 직역하면 늑대 부대. 광시성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용병 상비군이다. 명이 북로남왜에게 시달릴 당시 왜구를 막는 데 투입하였다. 냉병기 위주로 무장했지만 매우 용맹하여, 일본 검병들과의 전투에서 전혀 꿀리지 않았다. 왜구의 준동 이후로도 동서남북 주요 전선으로 투입하여 명나라의 히든카드로 활약했는데, [[척계광]]을 비롯한 군사개혁가들이 창설한 신식부대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중심으로 보급해 운용했다. 명나라가 순발식 총을 지발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했던 것을 감안하면 교지총은 형제들에 비해 상당히 고평가된 셈이었다. 그래서 후에 [[남명]]을 비롯한 명나라 부흥군과 [[청나라]]도 사용했다. 서양인들이 교지총에 내린 평가도 중국인들의 평과 별반 다르지 않아, 위력적인 총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 '''[[시암]]''' 화교들을 중심으로 화기를 생산했다. 베트남 만큼은 아니어도 양질의 총을 잘 만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주문 제작을 의뢰했던 적이 있다. 격발 방식에 대해 설명하자면, 순발식은 현대 [[싱글 액션]]의 조상으로써 매커니즘이 동일하다. 용두가 화약접시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게 기본 상태이기 때문에, 발사를 위해서는 우선 용두를 뒤로 젖혀 코킹해야 한다. 용두에는 용수철이 걸려 있어 원 상태로 돌아가려는 힘이 작용하고 있지만, 방아쇠와 연결된 용두 멈치가 이를 막는다. 그리고 사수가 목표물을 포착해 방아쇠를 누르면 용두 멈치가 풀리면서 용수철이 원상태로 돌아가고, 용두는 화약접시로 처박혀 점화약에 불을 붙인다. [[화승]]의 경우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에서는 [[대마]]나 [[아마]]의 속대를 꼬아서 만들었지만, 일본은 [[편백나무]]의 속껍질을 벗겨내어 썼다. 장점은 명중률이 높고 반응 속도가 빠르다는 것. 방아쇠압이 낮기 때문에 일단 장전만 해놓으면 조준에만 집중하면서 별다른 움직임 없이 손가락 하나 가볍게 까닥하는 것만으로 바로 발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스팅가의 탄생 배경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는 파도에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사격하거나 상대 배에 뛰어들어 정신없이 선상 [[백병전]]을 벌일 때 유용한 기능이었다. 높은 반응속도를 살려 잠깐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을 사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용수철이 퉁기는 진동이 발생하긴 하지만, 이 순발식 화승총의 용수철은 부싯돌을 철판에 강하게 때려 불꽃을 내야 하는 [[플린트락]] 방식과는 달리 불 붙은 화승을 화문에 갖다 대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다. 그래서 총에 익숙해진다면 진동도 충분히 제어 가능했다. 반면 단점도 만만찮았다. 가장 큰 문제는 불 관리였다. 용수철 탄성으로 용두가 화문에 고속으로 들이받는 과정에서 화승이 화약접시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용두에서 빠져 날아가거나, 심지어는 불이 꺼져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낮은 방아쇠압 때문에 잘못 건들면 오발도 종종 일어났다는 것이다. 위험하기도 했지만 특히 [[방진|육상에서의 집단운용]]에 있어 이는 명백한 단점이었는데, 심리적으로 위축된 병사가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잘못 건드리거나 하여 적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도 전에 멋대로 발포라도 하면 방진의 사격 제어가 엉망이 된다. 이는 이어진 돌격에 방진이 깨질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실제로 조선군이 병자호란 때 [[쌍령전투|이런 문제로 패전한 사례]]가 있다. 이로 인해 순발식 화승총은 일제사격이 중요한 대규모 보병전이 벌어졌던 유럽에서는 지발식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고, 명중률과 반응 속도를 살려 사냥용으로 잠깐만 쓰이고는 곧 자취를 감추었다. 명나라도 후술할 지발식 루미총과 서양총이 도입된 이후 유사한 평가를 내려, 동남아시아와 일본제 총의 기계장치가 운용하기 복잡하고 조작이 불편하다며 깠다.[* 격발 방식과는 관련이 없지만, 추가적으로 이들 일본 및 동남아 총들이 [[개머리판]]이 없어 신병들이 익숙하게 조준하려면 루미보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는 것도 주된 비판점이었다.] 다만 순발식 화승총은 사라졌지만 순발식 메커니즘 자체는 살아남아 수발식 [[머스킷]] 시대 이후로는 표준으로 자리잡았[* 용두가 철판을 때려 불꽃을 내야 했기 때문. 후술할 지발식 구조로는 이게 불가능하다. 다만 화승이 없으니 불 관리 문제는 없어졌다는 이점이 있었다. 오발 문제는 여전했지만 이는 강도 높은 제식 훈련과 차라리 적에게 죽는게 나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처벌을 가해 줄였다.]고, 뇌관과 탄피가 개발되고 [[리볼버]]의 시대를 지나 현대까지도 이어져내려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