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훈현 (문단 편집) === 바둑 입문 ===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태어났고, 목포시에서 성장했다. 9세 7개월에 프로에 입문하여 이 부분 최연소 기록을 아직까지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조훈현 九단은 실제로 52년생이므로 이것을 감안한다면 10세 7개월에 입단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1위 기록인데 2위는 [[이창호]]의 11세 1개월이기 때문이다. 3위는 [[조혜연]]의 11세 11개월, 4위는 [[최철한]]의 12세 2개월, 5위는 [[이세돌]]의 12세 4개월. 한국과 비슷한 입단 방식을 갖고 있는 일본의 경우 [[조치훈]] 九단이 남성 최연소 입단 기록을 갖고 있는데 그는 11세 8개월 때 입단하였다.] 조훈현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한국의 프로 初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소년 프로기사와 석점 치수의 실력 차이가 났다고 하였다. 거기다 조훈현은 조치훈과 달리 한국서 입단을 미리 한 다음 유학을 갔는데, 일본 기원에서는 조훈현의 기력을 연구생 4급으로 확 깎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자존심이 내려깔리는 상황에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것. 이창호가 입단했을 때엔 일본 기사와의 차이가 거의 없었으므로 이창호의 기록이 더 돋보일 수 있다. 물론 당시 조훈현이 바둑을 배울 때의 인프라의 차이는 이창호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었으므로 직접적인 비교는 무리이다.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5111215746359243.jpg]] 1963년 1월 6일, 세계 최초의 '''국제전화 대국'''을 하고 있는 조훈현 初단. 당시 입단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상대는 일본 국제호텔에 있던 [[이시다 요시오]] 初단. 사진 속 수화기를 들고 있는 사람이 [[조남철]] 九단이다. 이 대국은 조 初단의 완패로 끝났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1889.05.22~1972.07.27) 九단 밑에서 수학하였다. 이 세고에 九단은 생전에 제자를 소수정예로만 키웠는데, 이 중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 일본 관서기원 창립자 하시모토 우타로 9단, '기성' 칭호를 받은 현대 일본 바둑의 개척자 [[우칭위엔]](오청원) 九단, 조훈현 九단까지 3명이다.[* 이전에 세고에 九단의 제자가 3명 밖에 없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하시모토 우타로, 우칭위엔, 조훈현 외에도 히사이 케이시(久井 敬史,1920-2000), 이요모토 모모이치(伊予本桃市,1919-1974)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이노우에 이치로(井上一郎, 첫 제자), 마츠자와 츠루지로(松澤鶴次郎), 스즈키 케이조(鈴木圭三), 요네야마 토쿠(米山德)가 있다. 참고로 소수정예로 길러낸 이들이니, 모두 바둑계에서 업적을 크게 세웠다. 다만 조훈현이 마지막 제자인 것은 사실이다. 조훈현 외의 세고에 겐사쿠의 제자들의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3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수준이다. 세고에 겐사쿠도 원래 제자를 들일 생각이 없다가 바꾼 듯하다.] 세고에 九단은 이미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인지라 일본 바둑계의 최고 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으며, 그래서 애초에는 단순히 인사 차원에서 갔다고. 원래는 초청장을 보내는 등 여러 가지로 신경써 주기도 했고 여러 한국 출신 기사들이 배우고 있던 [[기타니 미노루]] 九단 문하로 가게 되어 있었다.[* 당시 [[조치훈]] 九단이 그의 밑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그랬는데 세고에 九단이 조훈현을 마음에 들어하여 지도기를 두세 판이나 두더니 확 낚아채 버린 것이었다. 기타니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세고에는 일본 바둑계에 하늘 같은 대선배인지라 순순히 보내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결국 세고에 九단 문하에서 일본기원에서 데뷔하여 세고에 九단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이때 13세였는데 이는 일본 타이 기록. 신기록을 세우지 못한 것은 같은 스승을 둔 문하생끼리는 바둑을 그렇게 격하게 두지 않는데 비해 혼자 세고에 九단 문하에서 수련하였던 조훈현은 앞서 서술한 기타니 九단 문하생들과 모두 싸워야 했던 것, 정확하게는 당시 일본 승단 대회에선 같은 도장 사람끼리는 겨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70~80년대 일본 바둑을 이끌 천재들이 다 모여 있었던 기타니 문하에 갔다면 조훈현의 일본 입단은 13살보다 더 빨랐을 것이라고. 조 국수의 회고에 따르면 유학 초기 세고에 선생님과 며느님(마마짱), 개 한 마리와 목조 주택에 살았는데 세고에 옹이 직접 지도 대국을 봐준다거나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는 법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 이유는 바둑은 답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책을 찾기를 원했던 것이다.] 후술할 내기 바둑 사건 때 격노하여 2주간 파문한 일을 제외하곤 항상 정갈하고 규칙적이게 사람을 맞고 바둑을 연구하고 의사가 반 홉만 마시라고 한 술을 홀짝홀짝대는 모습만 기억났다고. 처음엔 이해를 못했으나 세고에 옹이 "사람이 되어야 바둑도 된다"는 말을 깨닫고 깊게 새겼다고 한다. 따라서 조 국수는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웠던 일본기원에서 [[후지사와 슈코]][* 이른바 반상 위의 스승님. 조 九단이 그의 생전에 스승으로 모셨다.], 아베 등과 어울리며 자유롭게 바둑 기풍을 흡수했고 친목을 다졌다. 부작용이 있기도 했지만 이런 방침은 후일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인 뒤에도 이어져 조 국수 또한 일일이 바둑에 간섭한 적이 없다고. 데뷔 후 신예토너먼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성장세를 보이며 활동하던 중, 군 복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하였다.[* 그리고 훈병 시절 때 "좌로 가/우로 가"를 잘 못 알아들어서 본의 아니게 몸 개그를 했다고 회고했다.] 비슷한 시기 역시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조치훈]]은 고민 끝에 일본에 남았다. 당연히 병역법 위반이나 조치훈이 1980년대 일본 바둑계를 평정하자 정부에서 특별사면 시켜주고 불러서 국위 선양했다고 훈장까지 달아줬다.[* 조치훈 본인의 자서전에는 국민학교 입학을 하지 않아서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조치훈은 실제로 7살인 1962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자기 문하에서 성장한 조훈현이 라이벌 스즈키의 제자인 기타니 문하의 기사들을 꺾고 일본을 평정해 주길 바랐던 세고에 九단은 애제자를 빼앗긴 충격으로 인해 자살했다고 한다. 일부 바둑 팬들은 제자의 제자인 이창호가 세계 바둑계를 평정함으로써 비원이 이루어졌다고 평한다. 그런데 다르게 본다면 일본에서 내제자가 독립하는 때는 五단이 되거나 성인이 되었을 때로 하는 게 불문율인데 이미 조훈현은 당시 五단이었고, 곧 성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군대 문제가 아니더라도 세고에 九단 문하를 떠나야 할 때였다.[* 조훈현은 이창호를 내제자로 맞을 때도 이 불문율을 지키려 했으나 이창호의 성장이 너무 빨라 한국 나이로 17세, 四단이었을 때 내보내게 되었다.] 아마도 조훈현을 조치훈처럼 일본기원 소속으로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일지도. 1972년 자살 당시 83세인데도 불구하고 정정했기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http://news.donga.com/NewsStand/3/all/20140221/61099193/1|#참고]] 조훈현은 자신의 책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에서 자신이 한국으로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가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절친한 친구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씨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고 자살했다고 기록했다. 귀국 후 공군병으로 입대하며 국내에서 활동하게 된다. 유년기를 일본에서 보낸 터라 한국 생활에 적응도 해야 했고, 힘든 군 생활, 독립한지 얼마 안되어 일어난 스승 세고에 九단의 자살 등 여러 원인으로 명성에 비해 몇 년간 침체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군 생활을 하면서 배속된 대대의 대대장이 바둑 애호가라 조훈현은 대대장의 도움 아래 외출 등을 통해 기전에 참가할 수 있었다. 단 조건이 있었는데 '''지면 위병소부터 오리걸음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 부대 내에서 그의 바둑 상대는 드라마 [[올인]]의 모티브로 유명한 [[차민수]] 五단. 그 둘이 왜 붙었는지는 따로 후술한다. 다만 귀국 초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9살에 부모 품을 떠나 9년을 유학했으므로, 처음엔 '물' 같은 한국 단어도 기억 나지 않아 한국어에 서툰 조훈현을 다른 기사들이 곧잘 놀리곤 했다고.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한국기원과 일본기원의 문화 차이였는데 일본 시절엔 세고에 선생에게 바둑을 물어오는 유력 정재계 인사 누구도 한참 아래인 조 국수에게 하대하는 법이 없어 '조 선생 한 수 부탁 드리겠습니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학 후 한국기원에 오니 선생, 선배, 선배님 등 호칭 요구도 제각각인 데다, 빽 좀 있다는 사람 중엔 '어이 조군 한판 두세' 외치는 경우도 있어 힘이 들었다고. 물론 이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고민하다가 이 또한 한국 바둑만의 장점이자 역동성이겠다 마음을 고쳐먹고, 짜장면 내기 바둑 등도 곧잘 두며 기원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일본 바둑은 정갈한 만큼 지나치게 모양과 미를 중시하는 것이 단점이 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조 국수의 이런 예감은 차후 현실이 되어 일본 바둑계를 갈라파고스화시키는 데 일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