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흥은행 (문단 편집) == 역대 은행장 == [include(틀:역대 조흥은행 은행장)] ※ 1921 ~ 1928 / 1937 ~ 1951년까지는 '두취[* 頭取(とうどり). 일본에서 은행장을 부를 때 쓰인다.]', 1928 ~ 1937년까지는 '대표취체역[* 代表取締役(だいひょうとりしめやく). [[대표이사]]의 [[일본식 한자어]] 표현.]'이란 호칭으로 불렸음. * [[김종한]] (1897~1903) * [[완순군|완순군 이재완]][* 황족으로 [[고종(대한제국)|고종황제]]의 사촌이다.] (1903~1909) * [[이윤용]] (1909~1923) * 한상룡 (1923~1928) * 츠츠미 나가이치 (1928~1936) * 이가 세이이치 (1936~1937) * 하야시 시게키 (1937~1938) * 노다 신고 (1938~1943) * 구보 히게카즈 (1943) * 이와츠보 토모유키 (1943~1945) * 정운용 (1945~1947) * 김한규 (1947~1949) * 김교철 (1949~1956) * 정종원 (1956~1961) * 장용태 (1961) * 이호상 (1961) * 서병찬 (1961~1965) * 문종건 (1965~1969) * 박대진 (1969~1970) * 문상철 (1970~1972) * 고태진 (1972~1976) * 심원택 (1976) * 이동수 (1976~1979) * 김용운 (1979~1980) * 임재수 (1980~1982) * 이헌승 (1982~1983) * 송기태 (1983~1986) * 김영석 (1986~1991) * [[이종연]] (1991~1995) * 우찬목 (1995~1997) * [[장철훈]] (1997~1998) * 위성복 (1998/1999~2002)[* 1998년 8월 취임했지만 조흥은행의 부실에 대한 책임을 명분으로 11월 말에 갑자기 사퇴해버렸다가 1999년 4월 재취임했다. 훗날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금융감독위원회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했다는데 그 이유는 바로 조흥은행을 [[충북은행]] 및 [[강원은행]]과 합병하기 위해서. 애초에 위성복 행장이 '''전남 [[장흥군]]'''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취임 당시부터 매우 주목받는 실세 은행장이었는데, 이에 충북은행/강원은행쪽에서 '''"정부가 호남 출신 은행장 키우려고 지방은행을 죽이려 한다"'''는 반발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후 충북/강원은행과의 합병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심지어 흑자 전환까지 성공시킨걸 감안할 때 '''고향의 지역감정으로 곤욕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조흥은행장에 적임이었던 셈.] * 이강륭 직무대행 (1998) * 홍석주[* 2002년 3월 만 49세의 나이로 조흥은행장에 올랐는데, 1년 전인 2001년 3월 하영구 당시 씨티은행 서울지점장이 한미은행장으로 영입되면서 최초의 40대 행장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과 더불어 은행권 변혁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나마 한미은행은 칼라일 등의 외국 금융기관이 대주주였기 때문에 파격적인 인사가 가능했다지만, 조흥은행은 [[조상제한서]] 맏형격인데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대주주였기 때문에 더더욱 보수적인 이미지였던지라 홍석주 행장의 발탁이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었던 것. 심지어 홍석주 행장은 일선 지점장 경력조차 전혀 없이 외자유치 등의 경영기획 부서에서만 근무해온 기획통이었고 이미 1년 전인 2001년 2월에는 2급 부장이 상무로 승진하여 전 은행권을 술렁거리게 했다. '''기획부장(2급) → 상무이사 → 은행장 [[테크트리]]를 1년만에 달성한 것.''' 이런 고속 승진 탓에 일선 지점장들의 대다수가 은행장의 선배라는 기수 파괴 현상까지 벌어졌지만, 기획통 짬밥을 그냥 먹어온게 아니라는걸 반증하듯 앞으로의 경영 전략도 상당히 짜임새 있게 내놓으며 조흥은행의 독자생존을 진두지휘하면서 조흥은행 내부적으로 엄청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인 2003년 6월 조흥은행이 신한금융그룹에 인수되면서 사퇴한 비운의 은행장으로 남게 되었다.][* 홍석주 행장의 기획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사례가 여럿 있는데 1번째는 1998년 재미교포 사업가 김종훈의 투자와 관련된 협의가 진행되던 당시 총 2조원 정도의 자금이 경영 정상화를 충족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던 것과 2번째는 조흥은행의 매각대금 3조원 가량을 100% 현금으로 낼 곳이 없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1번째 사례는 이후 조흥은행이 공적자금 2조 7천억원을 받아 불과 2년만인 2000년 상반기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2번째 사례는 신한금융그룹이 자사 주식 일부를 매각대금으로 내놓으면서 홍석주 행장이 그야말로 작두를 타버린 격. 만약 조흥은행이 신한금융그룹에 인수되지 않고 분할매각을 통해 독자생존했더라면 이후 금융업계가 어떻게 돌아갔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 홍석주 행장이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고속 승진을 한건 위성복 전 행장의 영향력이 컸다. 위성복 전 행장과 홍석주 행장의 출신지가 각각 전남 장흥과 광주광역시로 같은 호남 출신이었던데다 앞서 언급한대로 홍석주 행장의 기획부장 경력도 위성복 전 행장의 재임 시절이었고, 2002년 초에는 위성복 당시 행장의 연임을 위해 홍석주 상무가 정부의 반대를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킹 메이커를 자처했기 때문. 그러나 이러한 로비가 씨알도 안 먹힌 탓에 위성복 행장의 연임은 물 건너갔고, 이에 새 은행장을 선임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는데 뜬금없이 홍석주 상무가 후보군에 포함된 뒤 면접에서 본인이 "2~3년 뒤에 도전해보겠다."는 말로 고사했지만 다음날 바로 홍석주 행장 선임이 결정된 것. 다분히 위성복 전 행장의 영향력에 대한 하마평이 있었고, 이후 매각 파동 전까지만 해도 꾸준히 위성복 전 행장의 수렴첨정이 금융권에서 간간이 화두가 되었다.] (2002~2003) * 최동수 (2003~200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