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족두리 (문단 편집) == 유형과 형태 == || [[파일:조반부인계림이씨초상화_국립중앙박물관.jpg|width=100%]] || [[파일:족두리(구례손씨족두리).jpg|width=100%]] || || 조반 부인 초상 || 구례 손씨 족두리 || [[여말선초]]에 활동한 조반(趙胖: 1341-1401)의 부인인 계림 이씨(鷄林 李氏: ?-1433)의 초상에서 족두리를 확인할 수 있다.[* 계림 이씨는 사온서 종7품 직장을 역임한 이양오(李養吾)의 딸이다. ] 이 초상에서 계림 이씨의 독특한 머리 모양은 [[가체]]가 아니라 족두리를 쓴 것으로, 구례 손씨 묘에서 출토된 족두리와 유사하다.[* 1979년 [[충청북도]] [[청원군]]에 있는 변유인(卞惟寅: 1566∼1641)의 첩 구례 손씨 묘에서 17세기 전기의 복식 유물 15점이 출토되었다. 그 중 족두리 3점이 있었으며, 현재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 구례 손씨의 묘에서 출토된 족두리 3점은 밑면의 둘레가 각각 61cm, 63cm, 69.5cm로 계림 이씨처럼 성인 여성이 머리에 완전히 쓸 수 있을 정도이다.[* 지금의 족두리는 사이즈가 훨씬 작아서 머리에 완전히 쓸 수 없고, 머리 위에 살짝 올려놓는 정도 밖에 안되는 것과 비교된다. ] 이에 따라 조선 말의 부녀자는 보통 뒷머리에 쪽을 짓고 앞머리 위에 작은 족두리를 얹었지만, 계림 이씨처럼 조선 초에는 머리카락을 모두 위로 올려빗어서 쪽을 만들고 그 위에 족두리를 쓴 것으로 보인다. 《성호전집》과 《[[이재난고]]》에서도 이러한 족두리 착용법에 대해 언급한다. >지금 듣자니 궁중의 모양새라는 것은 추계(椎髻)를 묶어 그 위에 족두리(簇道里)를 얹는 것이라고 합니다. >---- >[[이익(실학자)|성호 이익]], 《성호전집》 특히 양환의 부인 성주 도씨의 묘에서 출토된 족두리는 17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데, 머리에 쓰는 방식이었던 족두리의 원형을 알 수 있다. 비록 무덤의 환경상 견 섬유가 삭는 바람에 검은색 비단을 사용한 족두리의 겉감은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봉제선으로 족두리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출처: 조선의 명가 청주양씨 유물전(정미숙, 경기도박물관, 2015). ] || [[파일:족두리(성주도씨족두리).png|width=100%]] || || 양환의 부인 성주 도씨 족두리[* 2014년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출토되었으며, 청주 양씨 교리공파 문중에서 기증하여 현재 경기도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 || 그러나 18세기부터 족두리의 착용법이 변화하고, 족두리의 크기도 대폭 줄어든다. [[의원군|의원군 이혁]](李爀)의 일가 묘역에서 이장 과정 중 출토된 복식 유물에 족두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18세기 족두리의 모양을 알 수 있는 실물 자료이며, 18세기 이후 크기가 반 이상 작아진 족두리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 [[파일:족두리(안동권씨족두리).png|width=100%]] || || 의원군 이혁의 부인 안동 권씨 족두리 || 이처럼 족두리의 크기가 작아짐에 따라 [[화관#s-2]]과 비슷하게 쪽머리에 첩지를 착용하고 족두리를 쓰게 되었다.[* 족두리의 크기에 상관없이 족두리의 안쪽은 비어있기 때문에 첩지가 족두리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