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종리목 (문단 편집) == 생애 == 어렸을 때는 영흥이라는 곳에 살았는데, 직접 밭을 개간하여 벼를 심어 추수할 때가 되자 백성이 나타나 자신의 토지라 우기자 "황폐한 땅이라 개간했을 뿐이오"라며 추수하여 모두 그 백성에게 준다. 그런데 현의 장은 이 일이 법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그 백성을 옥에 가두고 법에 따라 처리하려고 하는데 종리목이 와서 >저는 잠시 머무는 사람에 불과한데 몇 알의 곡식 때문에 백성을 죽이면 어찌 이곳에 더 살려고 하겠습니까? 라며 산음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현의 장이 직접 만류하고 백성을 풀어주게 된다. 이에 목숨을 건진 그 백성은 고마운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에 종리목이 추수한 곡식을 도정하여 처자식과 함께 종리목에게 돌려주려고 왔는데, 종리목이 문을 걸어잠그고 받지 않자 문앞에 놔두고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져가는 자가 없었으며, 이 일로 인해 종리목의 이름이 높아지게 된다. 형 종리인이 종리목이 항상 자기보다 낫다고 추천한 것도 그의 이름을 높이는데 일가견을 한다. 이로 인해 오로 등용되어 [[육손]] 밑에서 일하면서 2천의 군사로 파양의 도적을 토벌하고 231년에는 [[반준]]을 따라 [[무릉만]]을 토벌하는데,[* [[사마가]]가 다스리던 그 무릉만이다. 이릉대전 이후 동오의 영향권에 들어갔지만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킨다.] 중간에 반준의 상황이 어려워지자 적의 영토 중앙에 있던 종리목은 버림 받았으나 이후에 반준의 상황이 나아져 적을 토벌하게 되자 겨우 살아서 돌아온다. 242년에 낭중을 거쳐 태자보의도위로 임명되었다가 남해태수로 승진했으며, 또 사직으로 임명되고 중서령으로 승진했다. 257년에 회계 남쪽과 파양, 신도의 산월이 [[반란]]을 일으키자 감군사자가 되어 그들을 토벌하면서 그 수장 [[황란]]과 [[상구(삼국지)|상구]]의 부하를 흡수해 그 공으로 진정후 월기교위가 된다. 263년에 촉한이 멸망하고 조위에 합병되면서 무릉만이 또 들끓기 시작하자 이들의 반란을 두려워해 평위장군, 무릉태수로 임명되었으며, 조위에서는 [[곽순(조위)|곽순]]이라는 자를 보내 우두머리들을 회유하면서 서양현으로 진격하자 곽순에게 호응을 하는 자가 늘어나 군내가 두려움에 떨었다. 이에 모든 관리가 겁에 질려 서서히 은혜와 신의로 그들을 달래야한다고 하자 종리목은 3천의 군사만 이끌고 적의 중심으로 들어가 후환을 끊겠다고 했는데, [[고상(손오)|고상]]이 "[[반준]]이 5만에다가 촉의 원조를 가지고도 힘들게 한 일을 지금은 촉도 위가 차지하고 있는데 3천으로 들어가겠다니 그때도 죽을 뻔 하더니 진짜로 죽으려고 한 것이냐" 하면서 말렸다. 지금은 비상시라 다르다는 말만 남겨 밤 낮으로 산속의 험준한 길만을 따라 2천리를 달려 우두머리 백명과 잔당 천여 명의 머리를 베니 곽순 등도 흩어지게 되어 오계를 평정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이 공으로 종리목은 공안독, 양무장군, 도향후가 되며 후에는 유수독으로 옮기며 전장군이 되어 부절을 받고 무릉태수의 작위를 받는다.[* 네이버 웹툰인 [[삼국전투기]]에서는 결코 스탯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전략이 재미있는 부분이라고 평했다.] 무릉태수로 임지에 있다가 죽어 그가 죽자 집에는 남은 재산도 없었으며, 관리와 백성이 모두 그를 그리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