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좌우합작운동 (문단 편집) === 민주의원과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좌우의 대립 === 반탁운동의 열기 속에서 우익 진영은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정부를 만들어 보자는 노력의 첫걸음이었다. [[이승만]], [[김구]], 김여식, 권동진, [[오세창]], [[김창숙]], [[조만식]](불참) 등 8명이 초청된 이 날 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 건국적 회의', 곧 국회를 자처하면서 정부 격인 최고정무회의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고 그 구성을 이승만과 김구에게 위임하였다. 2월 8일에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약칭 국민회)로 통합되고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추대하였다. 바로 두 사람의 단합에 의한 과도정권이 곧 수립되는 듯한 기세였다. 이승만과 김구는 논의 끝에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 명단 및 그 산하의 11개 상임위원장 명단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과도정권 수립의 산파역'을 임무로 탄생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는 이튿날인 14일에 [[미군정]]의 최고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민주의원(약칭 민주의원)으로 바뀌었다. 사실상의 정부가 서는 것을 원치 않는 미군정청의 요구에 따라 [[주한미군]] 사령관의 자문 기구로서 과도 정부의 수립을 촉진하는 사명을 띠고 민주의원으로 개원하게 된 것이다. 민주의원의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선출되고 25명의 의원은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이 그대로 선임되었지만 [[여운형]]은 이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렇게 우익 진영은 비상국민회의를 거쳐 민주의원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한편 좌익 진영은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조선독립동맹 등의 정당이 중심이 되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 전국농민조합연맹(약칭 전농), 조선민주청년동맹(약칭 청맹), 조선여성총동맹(약칭 여맹), [[천도교청우당]] 등 33개 정당 사회문화 단체가 참여하여 1946년 2월 15일에 여운형, [[박헌영]] 등 15명을 의장단으로 하는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을 결성함으로써 그 세력을 집결시켰다. 민주의원과 민전은 한편으로는 좌우합작운동에 있어서 각각 우익 측과 좌익 측의 근본 단체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는 좌우 대립의 시작점이 되었다. 1946년 3월 20일부터 시작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앞으로 수립될 임시정부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민주적 제정당·사회단체를 망라한 대중 단결의 토대 위에서 창설되어야 한다'는 소련의 주장과 '표현의 자유는 절대적이어야 하며 (중략) 소수파에 의한 한국 지배는 저지되어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이 서로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5월 6일 무기한 휴회로 들어갔다. 소련의 주장대로라면 3상회의 결정 사항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 단체는 미소공위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공위는 '의사 표시의 자유' 문제를 둘러싸고 결렬되고 말았다.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의한 한국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이에 대한 국내 각 정파의 반응은 여러 갈래로 나타났다. 우익 측은 세 영수가 각각 다른 노선을 밟게 되었다. 즉 이승만계는 단독정부 수립운동으로, 김구계는 반탁통일 운동으로, 그리고 김규식계는 좌우합작운동으로 나아갔고 좌익 측은 대체로 미소공위의 재개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듯하였으나 민족전선과 조선공산당, 그리고 [[중도좌파]]인 여운형계는 각각 정국 대처 방안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모스크바 3상 협정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미국은 신탁통치를 격렬히 반대하는 우익 세력, 즉 이승만, 김구 및 그들의 추종 세력을 지지하기는 어려웠다. 자신들이 소련에게 '한반도 신탁통치 30년안'을 주장했는데 정작 자신들을 추종하는 세력이 신탁통치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미 국무성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보내는 메시지 초안(1946. 2. 28)에 의하면 "현재로서는 어렵다고 느껴지겠지만 한국에 대한 확고하고도 발전적인 계획을 추진할, 김구 일파와도 연결되지 않으면서 소련의 조종을 받는 세력과도 연결되지 않은 그러한 지도자들을 우리의 지역 내에서 물색해 내기 위한 모든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력은 4대 자유를 강조하며 광범한 한국 민중에게 설득력 있는 근본적인 토지 및 재정의 개혁을 강조하는 내용의 진보적인 강령을 면밀히 검토하여 만들어 내도록 격려를 받게 될 것이며, 또한 지금으로서는 [[공산주의]]적 강령만이 가장 희망을 주고 있다고 믿고 있는 민중들을 그와 같은 진보적 강령에 끌어들이려는 목표를 갖고 동 강령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소련의 지지를 받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러한 세력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 직전에 미 국무성이 미국의 정책이 이승만, 김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진보적 지도자들(progressive leaders)'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음을 [[존 리드 하지|하지]] 중장에게 통고한 일이 있었다. '''이것은 신탁 논쟁이 격렬해진 뒤 미국이 남한 내에는 극단적인 세력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인물에게 통일 정책을 담당하게 하려는 정책의 변화를 말한다.'''[* 당시 미군정의 경제고문으로 좌우합작에도 관여하였던 키니(Robert A. Kinney)는 "미군정은 중도파를 지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중도파를 제외하고 이승만이나 김구 등 [[극우]]세력을 지지한다면 중도파들은 공산당과 합류, 큰 세력을 유지할지 모르며 또 우리가 중도파를 지지해도 [[민족주의]] 우익세력은 공산당과 합작할 리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민족주의 및 우익세력은 약 50%, 중도파는 40%, 그리고 공산당은 약 10% 정도의 분포를 보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미소공동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기본 골격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미국 측의 의도를 내포한 것으로서 그때까지 미국이 소련과의 문제 협상 타결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으로 풀이될 수 있으며 중도파를 선택하고 지지하려 한 이유는 한반도에서 소련의 괴뢰가 아닌 자국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한다는 미국의 기본적인 대한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미 국무성의 지시를 받은 미군정은 좌우익을 연결할 수 있는 중도파 인물을 물색하였는데 '''여운형'''과 '''김규식'''이 각각 중간 좌우 세력의 대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때, 당시의 정치세력과 그들의 입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정당 || 대표인사 || 성향 || 신탁통치 || 희망 정부형태 || || [[한국민주당]]•[[대한독립촉성국민회]] ||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이승만]] || 우파 ||<|2> 반대 || 남한 단독정부 || || [[한국독립당]] || [[김구]] || 민족적 우파 ||<|3> 통일 민족정부 ||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 [[여운형]] || 중도 || 유보 || || [[조선민족혁명당]] || [[김원봉]] || 민족적 좌파 ||<|2> 찬성 || || [[조선공산당]] || [[박헌영]] || 좌파 || 통일 공산정부 || * [[김구]]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중심의 [[한국독립당]] - [[민족주의]], [[반공주의]] 성향의 우익 세력으로 신탁통치 반대 입장. 남북 통일정부 수립 지향. 이후에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다가 김구는 1949년 암살당했고 나머지 인물들도 [[6.25 전쟁]] 때 대부분 [[납북]]당했다. * [[송진우(독립운동가)|송진우]]의 [[한국민주당]] 및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대부분이 극단적인 반공주의 성향의 우익세력으로 신탁통치 반대 입장.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지향. 단 송진우는 스스로 오보를 수정하려고 했고 김성수는 4당 코뮤니케에 협력하는 등 약간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에도 탁치에 찬성한다고 비난받았을 정도. 이승만도 이들과 입장을 같이하여 당시에는 이승만과 한민당은 한몸으로 인식되었지만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이 한민당 몫 장관자리를 하나만 배정하자 [[동아일보]]를 통해 이승만을 맹렬히 비난했고 [[발췌 개헌]]으로 완전히 결별했다. * [[김원봉]] 중심의 [[조선민족혁명당]] - 민족주의 성향의 좌익세력으로 신탁통치 찬성 입장.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 재개를 통해 남북 통일 임시정부 수립 지향. *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 - 공산주의 성향의 좌익세력으로 신탁통치 찬성 입장. 일제강점기 2차 조선공산당의 조선공산당 선언이나 4차 조선공산당의 정세분석을 이어받아 미군정 초기에는 조선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는 것은 극좌라고 비판하면서 부르주아민주주의를 추구했으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급진노선인 신전술을 채택했다. * 중도좌파 성향인 [[여운형]], [[조봉암]], [[홍명희]]와 [[중도우파]] 성향인 [[김규식]], [[김병로]], [[안재홍]]과 같은 [[사회민주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중도파 세력[* 좌익 진영은 [[근로인민당]]을 창당했지만 여운형 암살 이후 세력이 약해져서 일부는 월북하고 조봉암 등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한다. 우익 진영의 상당수는 이후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고 일부는 한국민주당에 합류하는 등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6.25 전쟁 때 상당수가 납북당했다.] -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 좌우합작운동과 미소공위 재개를 통해 남북 통일 임시정부 수립 지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