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좌우합작운동 (문단 편집) === 좌우합작위원회 구성 ===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김구]]와 [[이승만]]은 열렬한 반탁운동을 하게 되었고 [[미군정]]은 이들을 [[극우]] 세력으로 보게 되었으며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미군정의 [[존 리드 하지|하지]] 중장은 좌우를 포함하는 정치세력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승만은 이를 심각하게 반대하면서 하지 중장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이에 하지 중장은 전략을 180도 바꿨다. 이승만이 있으면 좌우를 포함하는 정치 세력이 생길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그를 배제하고 중립 인사들에게 좌우합작을 해 달라고 주문했으며 중도좌파에서는 [[여운형]], 중도우파에서는 [[김규식]]을 대표로 지목했다. 이미 중도파 세력들은 4당 코뮤니케가 무산되자 '좌우대립이 이렇게 계속되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면, 남북은 결국 분단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 인사들은 1946년 7월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위원장에 김규식을 선출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인물 구성을 보면 중도우파 계열은 [[김규식]], [[안재홍]], [[원세훈#s-1|원세훈]], [[최동오(독립운동가)|최동오]], [[김약수]] 등의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중도좌파 계열로는 여운형, [[여운홍]], 성주식, [[장건상]], 이영, 정노식, 정백, [[리강국]] 등이 참여했다. 정작 핵심 합작 대상인 이승만 및 한민당과 공산당은 없었다. 좌우합작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좌우 사상을 넘어서 '조선 반도'가 하나로 통합되어 중도적 사상의 임시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 먼저 좌파와 우파 세력들 간의 연대를 시작해서 합작 운동을 실현하고 그런 다음에 [[서울]]과 [[평양]] 간의 남북연합을 추구하며 마지막 최종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기시키고 미국과 소련 등 열강을 설득하여 '통일 임시정부'를 하루속히 추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