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교 (문단 편집) === 중세에서 현재 교회(476~) === 사실상 [[로마 제국]]의 마지막 단일 통치자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그의 두 아들이 각각 동부와 서부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었고, 서부(통칭 [[서로마 제국]]) 쪽이 이민족들의 침입에 시달리며 멸망하면서 로마 서부에서 유일한 총대교구였던 [[교황]]이 급부상한 것이다. 451년 [[훈족]] [[아틸라]]가 [[로마]]로 침공하자 [[교황| 로마 주교]] [[레오 1세(교황)|레오 1세]]는 [[아틸라]]와 협상을 벌인 결과 [[훈족]]이 [[로마]]를 약탈하지 않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한 세기 후의 인물인 [[그레고리오 1세]] 또한 권력의 공백기 동안 로마 교구의 위상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로마 교회가 다른 교회들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했으며, 이것이 장차 [[동서 교회 대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 로마 교회가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이미 3세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교황 [[빅토르 1세]](186/9~197/201)는 각 교구 간 차이를 보이던 부활절 날짜를 로마식으로 강제 통일을 시도하였으나 [[리옹]]의 [[이레네오]]에 의해 저지 되었다.[* [[한스 큉]], "가톨릭의 역사, 70-71.] >성찬 공동체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친교{{{-2 communio}}}는 부정적 대립 개념인 파문으로 대응되었다. 친교 서한을 교부할 권리를 지닌 주교는 공동체와의 관계를 거부할 수도 파기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조치는 무분별하게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친교 관계가 깨지면 사람들은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계속 따르기를 거부했으며, 그는 스스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 2세기 중엽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가 아니케투스와 [[부활절]] 날짜를 협상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을 때, 두 사람은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레네우스는 그들이 이룬 교회의 일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들은 공동으로 성찬례를 집전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5,24,17 참조). 로마의 주교는 소아시아 주교에게 성찬례를 주관하게 했으며, 두 사람은 평화롭게 헤어졌다. 후대에 로마의 주교 빅토르는, 소아시아인들이 부활절 날짜에 관한 그의 이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그들을 파문하려 하면서 더 완고하게 대응했다.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행 중에 로마에서 더 이상 손님으로 환대받지 못했고, [[미사]]에 참석하지도 못했으며 서신을 주고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여러 교회회의에서 빅토르의 월권에 대한 저항이 매우 격렬하여 그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340쪽 참조). 빅토르의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이는 로마가 다른 공동체에 명령할 수 있는 우위에 있다는 로마의 권리를 드러낸다. 이론적으로 모든 주교가 동등하기에, 그들은 신앙에 대해 믿을 만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전권과 다른 주교가 이단에 빠졌음을 단언할 수 있는 전권을 지녔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각 주교좌가 특히 신앙에 관한 문제에서 두드러진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았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오랫동안 교회의 주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당연했다. >----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276-277쪽 >---- >[[부활절]]의 날짜 결정에 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에 많은 저술가가 관여하고, 교회회의가 열렸으며, 빅토르 주교(188~189)가 주도하는 로마 교회와 소아시아 교회가 거의 분열되는 수준에 이르렀다(277쪽 참조). 소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을 유대인의 파스카 축제를 본받아 니산 달 14일, 곧 춘분 다음 만월이 되는 날에, 그 밖의 교회는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거행했다. 그러나 '14일파'와 '주님의 날파' 사이의 논쟁은 단지 사소한 날짜 차이라는 문제만 아니라 축제 내용의 이해에 관한 강조점을 드러낸다. 사르데스의 주교 멜리톤의 『파스카 설교』(107쪽 참조)가 분명히 밝히듯이, '14일파' 제식은 참된 어린양인 그리스도로 구약성경의 파스카 축제를 회상했다. 이와 달리 '주님의 날파'는 무엇보다도 주간 첫날에 예수의 부활을 회상했다. 이 두 파는 자신들의 부활절 날짜를 지키면서도 상대방의 날짜를 인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가 로마의 주교 빅토르의 견해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아시아 교회와의 분열은 피할 수 있었다. >---- >-같은 책, 340쪽 그리스도교가 공인, 국교화된 4세기에는 더욱 강경한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율리오 1세]](337~352)는 "로마 교회는 주교의 지도 아래 모든 탄원을 심사하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다마소 1세]](366~384)는 처음으로 마태오 복음서 16장 18절을 로마 주교의 권위 강화에 사용하였다. 다마소는 로마 주교좌만이 ‘사도 전승의 보좌’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시리치오]](384~399)는 ‘교황(Papa)’이라는 호칭을 로마 주교에만 국한시켜 사용하게끔 했다. ‘파파’라는 말은 본래 동방에서는 주교들을 일컫는 일반 명사였으나 서방에서는 로마 주교를 일컫는 고유명사로 변화하였다.[* 비슷한 예로 '짐'을 황제 전용으로 바꾼 진시황이나 고위 관료들에게 두루 사용되던 경칭이던 '각하'가 [[박정희]]에 의해 대통령을 일컫는 고유 명사가 된 것 등이 있다.] [[인노첸시오 1세]](399~417)는 모든 중요 사항을 주교회의에서 검토한 후 교황이 이를 최종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보니파시오 1세]](418~422)는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고 주장하면서 항소를 금지하려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레오 1세(교황)|레오 1세]](440~461)와 [[그레고리오 1세]](590~604) 같은 교황들이 나올 수 있었고, 서유럽의 다른 교구는 독립성을 잃고 로마 교구 밑에 예속되기 시작했다. 권력 독점을 향한 교황들의 노력은 훗날 위서로 판명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와 ‘이시도르 문서’를 통해 문헌적으로 뒷받침되었다. 위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와 제국 서쪽을 교황 [[실베스테르 1세]](314~335)에게 증여하였으며 교황이 황제의 표장, 자색 도포 및 궁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고 다른 총대교구에 대한 지상권을 허락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문서이다. 사실 이 문서는 로마 주교를 모든 교회의 으뜸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지만, 비평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오랫동안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한스 큉]], "가톨릭의 역사", 72-74.] 또한 로마 주교는 800년 [[샤를마뉴]]를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하였는데 이는 선례가 없는 일이어서 동로마 황제를 비롯한 동방 교회의 반발을 샀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그리스도교가 주류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점차 로마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고는 해도, 근본적으로 로마 황제는 세속 시민사회의 공화주의적 법제에 근거한 지위였지, 종교적 권위에 근거하는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대에나 중세에나 로마 황제는 동서를 막론하고 (명목상으로든 실제상으로든) 제국시민이 추대 및 승인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래서 혈연이나 전임자의 지명과는 무관하게 대중적 동의를 얻는 자가 제위를 계승하기도 했고, 황제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폐위되기도 했으며, 때때로 시민사회 내 견해차로 파벌이 나뉘어 내전까지 벌어졌다.(예컨대 수도-지방 갈등) 즉, 교황에게는 황제를 옹립할 근거가 없었으므로 동로마 세계가 반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교황| 로마 주교]]의 [[교황수위권|수위권]] 주장과 행동은 필연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로마 제국의 동부와 서부 사이에는 이전부터 크고 작은 갈등이 있어왔다.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교회로 국한시킨다면 [[전례]] 문제와 교리[* 754~787년에 일어난 [[성상(조형물)|성상]] 논쟁, 867년 [[필리오케 문제]]. 이미 필리오케 논쟁으로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파문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옛 수도 [[로마]]와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간의 미묘한 신경전도 있어왔기 때문이다. >The ancient customs of Egypt, Libya and Pentapolis shall be maintained, according to which the bishop of Alexandria has authority over all these places since a similar custom exists with reference to the bishop of Rome. Similarly in Antioch and the other provinces the prerogatives of the churches are to be preserved. In general the following principle is evident: if anyone is made bishop without the consent of the metropolitan, this great synod determines that such a one shall not be a bishop. If however two or three by reason of personal rivalry dissent from the common vote of all, provided it is reasonable and in accordance with the church’s canon, the vote of the majority shall prevail. >---- >-[[https://www.papalencyclicals.net/councils/ecum01.htm|제1차 니케아 공의회 카논 6]] 또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시대를 기준으로 교회는 삼두 체제[*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였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상 상승 등으로 오두 체제[* 삼두 체제+콘스탄티노폴리스+예루살렘]로 변화한 것도 갈등의 원인이다. 이러한 시대 흐름에서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는 알렉산드리아를 밀어주는 경향이 있었는데,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측의 교회 이해[* 새 로마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상 강조]는 은연중에라도 로마 개별교회를 '정치적 중심지니까 그러한 위상을 얻은 것'이라고 해석함을 전제하기에, 복음사가 마르코를 통해 사도 베드로에게 연결되는 전승을 가진 알렉산드리아와는 달랐다. 결국 1054년 [[교황]]이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파문하고, 역으로도 파문이 이루어짐으로써 동서 교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 다만, 이 시기 파문이 [[동서 대분열|동서교회를 완전히 갈라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 파문은 유야무야되었고, 이후로도 동서교회는 교류를 지속하였으며,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동로마 황제 3인 간 치열한 야합과 갈등이 반복되었다.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서방교회가 동방교회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지고서야 비로소 양자 간 관계는 회복불능으로 치닫는다.] 한편 [[교황]]의 지원 아래 황제의 위에 오른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는 서방 교회의 다양한 전통과 관습을 로마를 기준으로 정비시키기 시작했다. [[미사]]는 로마 양식에 따라 [[부활절]] 날짜를 비롯하여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였던 교회력도 로마를 기준으로 맞춰졌다. 1077년에 이르러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주교의 서임권은 교황에게만 있다"고 천명했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했다. 여기서 황제가 주교 서임권 문제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것은 고대 교회의 전통에 의거한 것이었다.그리스도교는 국교였으므로 그리스도교의 문제는 곧 국가의 문제이며, 국교 문제를 떠나더라도 주교는 성직자와 평신도 양쪽의 의견이 고루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첫 에큐메니컬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직자는 커녕 세례도 받지 않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했다.[* 물론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만 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는 아니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어디까지나 제국 내 종교 중 하나였고, 세속적 공민주권에 근거하였던 로마 제국에서는 각 종교를 황제 등 세속 권력 하에 두었다. 로마 황제는 예로부터 [[폰티펙스 막시무스|최고 사제]]를 겸했고, 이는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자리잡은 이후에도 한동안 존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황제는 교회에 적법하게 관여하였다.] 그런데 1077년에 이르러 교황은 주교를 자신의 의중으로만 뽑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이에 황제가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카노사의 굴욕]]으로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그레고리오 7세를 교황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한 번 무릎을 꿇어버린데다 후계구도를 놓고 싸움까지 일어나 황제의 권위가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없게되자 하인리히 4세의 뒤를 이은 하인리히 5세가 1122년 보름스 협약(Concordat of Worms)을 통해 교황에 의한 주교 서임을 인정하였고 대신 교회 재산은 세속 군주가 하사하는 내용으로 이 문제에 합의를 보았다. 이 협약에서 애매한 부분은 1139년 제 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좀 더 다듬어져, 서방교회에서는 교황이 주교를 서임하는 전통이 확립되었고, 각 교구는 로마 교구 밑에 확실히 종속되었다.[* 제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엄연히 또 한 사람의 주교인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도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확립되었다. 교황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추기경]]에게만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지역교회들은 여전히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다. 고유의 암브로시오 [[전례]]를 고집한 북이탈리아 밀라노 교구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 자치에 자긍심을 느끼던 많은 지역 주교들은 이러한 조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무렵 지역교회와 교황청 간 갈등을 유발하였고, 때때로 서임권 투쟁과 같은 세속 군주제후와의 갈등이나 코뮌 운동과 같은 도시공동체의 자치권 투쟁과 접목하기도 하였다.] 이후 [[가톨릭|서방]]에서의 주교 제도는 중세 후기,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 발발 등으로 교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타락함으로써 1인 주교가 복수의 교구를 담당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교구에서 나오는 성직록을 얻기 위해 실제로 임지에 부재하면서도 해당 교구를 관할할 권리를 받았는데, 이는 교회의 타락을 가속화했다. 예를 들어 1517년 [[종교개혁]] 당시 [[면벌부]] 판매를 종용했던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자그만치 교구를 3개나 겸임했다. 결국 이와 같은 행태는 [[종교개혁]]을 야기하여 서방 교회를 분열시켰다. 로마 가톨릭 자체 내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나머지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한 주교의 복수 교구 겸직을 폐지하여 종전처럼 1인 주교가 1개 교구만을 맡도록 하여 오늘날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