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주막 (문단 편집) == 역사 == 오늘날 알려진 여객 업소로서의 주막과 같은 시설이 사료에서 등장하는 것은 조선시대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알려지면서 조선 이전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주막이 나오면 [[고증오류]]라고 간주하는 시각도 생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려시대 이전에 여객 업소가 등장하면 무조건 고증오류라고 할 수 있냐면 그렇지도 않다는 점이다.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에서 과거로 올라갈수록 사료가 비교적 부족해지고, 과거 역사서는 왕사를 중심으로 쓰여졌으므로 주막 같은 것이 실재 하였더라도 사료로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오래 전의 민중의 놀이문화 같은 것은 거의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당시 민중들이 놀이를 하지 않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삼국시대]] 당시에도 이미 기생이 있는 술집이 있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근거는 [[신라]]의 [[김유신]]이 [[천관녀]]라는 기녀를 만나러 술집을 다녔다는 사료다.[* 김유신이 천관녀라는 기녀에게 빠져 술집을 다니다가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고 말머리를 베었다는 유명한 일화다. 자세한 내용은 [[김유신]], [[천관녀]] 문서 참고. 나중에 김유신 본인도 천관녀가 딱했던지 그녀를 기리기 위해 천관사라는 절을 지었다.] 이 일화는 고려시대에 쓰인 [[파한집]]에서 유래하므로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도 않은 것이 실제 천관녀를 기리는 천관사(天官寺)라는 절이 7세기 경주시에 지어진 것이 분명하니[* 지금도 유적이 조금 남아 있다.] 신라에 기녀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삼국시대에 기생 술집이 있었다는 근거는 우연히 역사적인 인물인 김유신이 천관녀에게 반했기 때문이고,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일화는 후대로 전해지지 않고 당연히 신라에 기생 술집이 있었다는 사실도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막과 비슷한 숙박, 접객 시설도 단지 사료로 남아있지 않을 뿐 실제로는 있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즉, 주막 같은 시설이 조선시대 이전에 있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없었다고 단언할 수도 없으므로 무조건 고증오류라고 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일부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적 [[인프라]]와 적정 수준의 수요가 뒷받침 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녀를 동반한 고급 숙박업소가 아닌 주막과 같은 대중들이 이용하는 숙박업소와 [[요식업]]은 발달이 더디었을 가능성이 높아 설령 있더라도 흔하지는 않았을 것이며 있었더라도 [[서라벌]], [[개경]] 같은 주요 도시 위주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실제 조선시대 후기에 신분과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는 주막이 지역 곳곳에 다수 들어섰던 역사적인 사례를 보면 이러한 주장 또한 하나의 추측일 뿐이므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확실하게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고려시대는 물론 삼국시대나 원삼국시대보다 더 이전이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장사, 행정업무, 교육 등 여러가지 목적으로 여행을 다녔으므로 그 사람들이 어딘가에서는 묵었을 거라는 것이다. 역사에 기록이 남은 경우로는 [[거칠부]], [[백석]], [[임자(백제)|조미압]]처럼 주변국을 염탐하기 위한 여행을 했던 사례가 있다. 이런 경우 물론 야영을 했을 수도 있고, 민가에 일시적으로 부탁해서 묵었을 수도 있으며, 관리인 경우에는 관의 시설에서 묵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충족이 되었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어쩌면 원시적인 [[물물교환]]에 의존하더라도 숙박을 주로 담당해주는 [[민박]] 같은 곳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막은 조선 후기를 다루는 사극은 물론이고 심지어 원삼국시대를 다루는 사극에서도 등장하는 단골 요소다. 등장 인물들이 서민적인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계획을 꾸미는 시츄에이션을 넣기엔 이보다 적절한 장소가 없기에 넣는 듯하다. 언급한 대로 고증에 맞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고 말할 근거도 부족하므로 창작물에서 등장하는데 무리가 없다. 또한 술을 마시는 '[[술집]]'의 경우는 주막처럼 복합적 형태가 아니었을 뿐 주점, 주가, 주헌, 주루 등 여러 명칭으로 기록되었다. 여행자를 위한 숙박, 편의시설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역참|역(驛)]]'과 '[[원(숙박시설)|원(院)]]'이 있었다. '역'은 공무로 여행하는 관리들이 말을 바꿔 타는 공간이었고, '원'은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곳이었다. 역과 원은 국가에서 공적 용도로 사용했던 곳이고 17세기 초까지도 공무가 아닌 일반 여행자가 잠을 잘 수 있는 주막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 여행자는 지역별로 존재하는 [[절(불교)|절]]에서 숙박하거나, 아니면 좀 큰 부잣집에서 잤다. 여행자에게 저녁밥을 내주고 하룻밤 재워주는 건 근현대 이전에는 일반적이었다. [[접대의 관습#s-6.9]] 문서 참고. 결론적으로 대중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술과 음식, 그리고 숙박을 제공하는 상업 형태로써의 전형적인 주막은 '''조선 중기'''부터 나타난다. 주막은 [[임진왜란]] 당시에 쓰여진 일기인 고대일록(孤臺日錄)에서 처음 언급된다. 그리고 [[17세기]]에 관설 [[원(숙박시설)|원(院)]]의 기능이 쇠퇴하고 참마다 참점(站店)을 설치하여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등장 빈도가 높아진다. 1604년에 편찬된 갑진만록(甲辰漫錄)에 따르면 영남이나 삼남대로변에 있는 주막에도 술과 말을 먹이기 위한 풀, 그리고 땔나무밖에 없어서 여행객들은 여행에 필요한 생필품을 두세 마리의 말에 나누어 싣고 다녔다는 내용이 나와 17세기 초반까지는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막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후이다. 전쟁의 상처가 가라앉고 [[대동법]]이 시행되고 상품경제가 발달하여 화폐 유통량이 증가하고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보다 활발해지면서 여행객에게 술과 음식, 그리고 숙박을 제공하는 주막들이 제법 번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막에서 일하는 여주인을 [[주모]]라고 부른다. [[기생]]일을 은퇴한 퇴기(退妓)출신이 많았고, 격이 낮은 궁녀나 나인들이 퇴궁하거나 궁에서 쫓겨나 주막을 차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3235|#]] 그외에도 가난한 백성들이 농사 대신 너도나도 할것 없이 주막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전해진다. 큰 고개 밑의 길목, 교통 요충지 대로변, 나루터 주변, 장터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지나가는 장소에 위치했는데, 주막을 알리는 간판은 '酒'라고 쓴 깃발이나 등을 걸거나, 술 거르는 도구인 용수를 장대에 달아 문앞에 걸어두기도 했다. 식사로는 양지머리로 국물을 우려 간장을 타서 먹는 장국밥이 주종을 이루었다. 술은 [[막걸리|탁주]]나 청주를 팔았으며 양반이나 고관들은 방문주라 하여 주막에서 따로 만든 고급술을 팔았다. [[한성부]]([[한양]])이나 [[평양부]] 등의 큰 도시의 주막에서는 술과 밥만 팔았지만 지방에서는 식당, 주점과 숙박업을 겸했다. 규모가 큰 주막이 아니면 보통 봉놋방이라 불리는 온돌이 있는 큰 방에서 잠을 잤는데 식사한 사람들은 공짜로 쓸 수 있는 곳도 있었다. 대신 그만큼 사람이 몰려 비좁은 경우가 많았고 남녀 가리지 않아서 혼숙을 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주막이 점차 사라지던 시기는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초기부터인데, 이때 신작로가 뚫리고 자동차들이 많이 다니면서 많은 주막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세태 변화에 빠른 주모들은 도로 공사를 하러 나온 측량사나 자동차 운전기사들에게 돈을 찔러주거나 술을 먹여 꼬드겨서 자기네 주막에 사람들이 들러갈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막이 사라진 것은 신작로가 뚫려서라기 보다도 주요 장거리 교통로를 철도가 대체해서 라는 점이 더 컸다. 이 당시에는 자동차는 커녕 버스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빠르게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에서도 자동차는 잘사는 사람들이나 보유할 수 있던 시절이라 철도가 훨씬 대중적인 교통수단이었다. 이렇게 주막이 점차 사라져갔지만 철도가 커버하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여전히 주막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여인숙과 여관이 시골 방방곳곳에까지 널리퍼지면서 남은 주막들은 점차 폐업하거나 술집, 여인숙으로 갈아탔고, 최후의 주막으로 알려진 경북 [[예천군]] [[풍양면(예천)|풍양면]]에 있는 삼강주막의 [[주모]] 유옥련 씨가 [[2005년]]에 사망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삼강주막은 2005년 12월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고 2007년까진 빈집으로 방치되다 2008년 해체 후 관광지로 개발되어 옛날처럼 술이나 음식 등을 판매하기도 하지만, 본래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유옥련 씨 생전에 찍힌 사진들을 보면, 삼강주막은 [[새마을 운동]]이 진행된 [[1971년]]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시멘트로 보수한 전형적인 오래된 시골집으로 주변에 논과 풀밭, 강둑이 있었는데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090519000228|2005년 당시의 모습]] 2008년 해체 후 복원하면서 황토벽에 초가지붕 얹은 전혀 다른 건물로 만들어 버리고 주변도 싹 밀고 정비해서 옛 자취는 완전히 사라진 단순한 관광지가 되었다. 옛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건 주막 내부에 보전해 놓은 유옥련 씨의 외상장부[* 그녀는 [[문맹]]이라 벽에 금을 그어 표시했다.]와 주막 뒷편의 [[느티나무]] 뿐이다. 생전에 찍힌 다큐 영상을 보면 유옥련씨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숙박업소 기능은 사라지고 동네 노인들 마실 나와 간단한 안주에 소주 한잔 걸치는 [[점방]] 정도의 역할에 머물렀다. 이 땐 매출이 적어 막걸리는 들여놓을 수 없었고[* 막걸리는 적어도 일주일안에 소비하지 않으면 시어버린다.] [[소주]]와 [[과자]]를 팔았다. 소주도 한병에 1000원에 팔아서 남는건 거의 없었다고 한다.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3/03/2007030300218.html|유옥련 씨를 회상하는 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