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공업 (문단 편집) ==== 근대(~1945) ==== [[조선]]의 공업은 가내수공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기술을 천시하는 시대상으로 인하여[* 조선 초기에선 이런 경향이 비교적 약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 질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성리학은 조선에서 도전이 불가능한 이념으로 자리잡았고, 그 이외의 것들은 천한 것으로 여겨졌다.]에 의하여 가내수공업과 그 업무에 종사하는 기술자들도 천대받았고 이러한 기류속에서 기술직에 나가는 것은 선호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는 조선이 개항하고 나서 조선의 상업이 [[청나라]]와 [[일본제국]]에 밀리는 원인이 되었고[* 심지어 조선내의 시장에서 조차 조선인 사업가들이 외세의 사업가들에게 밀리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조선의 공업제품이 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던 것도 있고 이를 막아야할 관세가 개항 초창기에 제 구실을 못했던 이유도 있다.] 조선 민족자본 형성과 자본주의 도입이 늦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조선은 자국이 외세에 휘둘리는 이유를 군사력 부족 때문으로 인식했고, 군사력을 진흥시키기 위한 세수확보를 위해서 상공업에 대한 제약을 풀었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성립하자 [[고종황제]]는 서구식 공업체계를 도입하기를 원했고, 공업진흥책을 추진하여 공장설립을 유도했다. 하지만 황실부터가 사농공상의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때문에 내탕고와 국고를 풀어서 국가주도의 경제개발(공장 설립과 운영)을 하지 않았으며, 국가의 경제진흥책도 기존 지식인 계층의 상공업종사 기피와 상업자본가계급 형성 실패, 일본제국의 방해로 인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경공업]]에서 만큼은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던건 분명했고[*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이 이 때에 성립했고,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도 이 때에 설립되었다.], 이를 경계한 일본제국은 조선의 상공업을 짓밟기 위해서 1904년에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해서 걸음마를 걷고 있던 조선의 자본주의에 철퇴를 가했다.[* 1897년에 시작한 공업화가 10년도 지나기 전에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던건 일본제국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실제로 대한제국은 총기를 비롯한 군수품을 자력으로 생산한다는 계획을 설립했었고, 그에 필요한 중공업진흥책도 있긴 했었다.][* 실제로 1905년에 용산군기창이 설립되어 소총과 탄약 생산을 시작하기도 헀다. 문제는 그 직후 을사조약이 체결된 탓에 제대로된 운영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본제국의 조선 상업자본 탄압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중공업 진흥책은 시작도 못하고 돈좌되었다. [[대한제국]]을 [[경술국치|병탄]]하고 나서야 [[일본제국]]은 일본 본토의 기업을 끌여들여서 일본인들에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공업화를 실시헸다. 때문에 [[한반도]]에 유의미한 중공업시설이 처음 생성된 것은 [[미쓰비시]]가 1918년에 황해도에 건설한 [[황해제철연합기업소|겸이포 제철소]]였고, 이후부터 [[중일전쟁]]직전까지 중공업책은 일본 본토에서나 있었기에 유의미한 중공업 시설건설은 없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중공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중일전쟁]]을 전후로 해서 일제가 만주와 중국 침략을 위해서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다. 1936년 10월, 조선산업 경제조사회에 따라 한반도의 중공업이 [[일본 제국]]의 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1938년 9월, 총독부의 시국대책 조사회의회에 따라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소재들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마련되었다. 이때부터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규모 중화학공업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흥남 지역에 일본질소비료(노구치)가 흥남비료공장을 세우는걸 시작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화학콤비나트가 들어선다. 그 결과 1940년에 이르면 화학, 기계, 금속 공업 따위의 중공업 규모가 경공업의 그것과 동등해지며 우세를 띠게 되었으며 1944년 한반도의 자급률은 50%에 육박하게 된다.[* 카터 J. 에커트의 글에 나온다.] 하지만 일제의 중공업 건설은 철저하게 일본의 자본으로, 일본의 기술에 의해서, 일본의 필요를 위해서만 추진되었기 때문에 주요 중화학공업 기업의 경영과 기술진에서 조선인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그 과실 또한 조선민중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당시 흥남 지역은 일본제국을 통틀어서 최대 규모의 공단지대였지만, 공장시설과 일본인 거주지를 제외한 대부분 조선인 구역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다. 출처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