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집 (문단 편집) == 역사 == 중국집에 [[홍콩]]이라는 이름이 많은 것은 [[중국]]과 수교하지 않았던 냉전 시기, 적성국가였던 중국의 이름을 쓸 수 없어 대신 쓴 이름이다. 중국은 송나라 때까지는 중국에서도 날 음식을 많이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옛날부터 재료를 날 것으로 먹는 것은 더럽고 장에 좋지 않다 하여 볶거나 삶는 요리가 많다. [[송나라]] 시절 유채기름이 발명되기 전에는 주로 찜요리나 탕요리가 발달했고 유채기름이 발명된 뒤에는 볶고 튀기는 요리가 발달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유채기름보다는 [[돼지기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나 포화지방이 대부분이라 어는점이 높아 상온에서도 굳기 때문에 중국집의 배수구가 막히는 주요인으로 여겨졌고 현재는 대개 식물성 식용유를 사용한다고 한다. [[대한제국]] 때 [[차이나타운]][* 사실 그 이전에도 중국계 이주민의 유입이 있었고, 사신단이나 상인들이 중국으로 오갔기 때문에 중국요리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원래 한반도에서 밀가루와 식용유가 비쌌기 때문에 튀김류 요리는 대중화되지 못했고, 주로 만두나 국수요리 위주로 흔적이 남았으며 그나마도 오랜시간에 걸쳐 현지화되어서 많이 달라졌다.]에서 시작되어 해방 이후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집이 아닌 '''"[[청나라|청요릿집]]"''' 등으로 불리고 이때만 해도 외식이 흔치 않아서 [[중국 요리]]가 제법 고급 요리에 속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고급 식당의 이미지를 갖추고 있었으나 80년대 이후 외식산업이 활성화가 되면서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명칭도 현재의 "'''중국집"'''이 되었다.[[https://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814422|#]][* [[야인시대]] 합성물 중 [[https://www.youtube.com/watch?v=KyBdPJPIEpU|짜장면을 배달하는 김두한]]에서 김두한이 1940년대의 배경에 맞게 자신의 중국집을 청요릿집이라 부르며, '짱깨'라 부르는데 대해 크게 불쾌감을 표시한다.] 이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대표적인 배달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본디 [[중국 요리]]를 비롯한 면요리는 만든 후 즉시 먹지 않으면 맛이 떨어지기에 고급 음식임을 표방하던 이른바 "청요릿집"은 배달음식으로서의 [[중국 요리]]에 동참하지 않게 되고, 결국 [[중국 요리]]가 배달 음식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게 되면서 서서히 도태되어 갔다. 물론 옛날 청요리집이 배달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일부 청요릿집은 배달을 하기는 했었다. 중국집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바람에 가격경쟁이 심해지고 [[군만두]]의 대량 납품이 시작되어 만두의 맛이 가게마다 비슷비슷해졌다. 정말 막장인 곳은 짜장 소스부터 짬뽕 국물에 심지어 [[탕수육]]까지도 공급된다. 중국집은 다른 음식점보다 노동이 굉장히 빡세기에 생긴 편법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맛은 형편없다. 중국집과는 다르게 1960~70년대 청요릿집은 주방장이 원재료로 모든 음식을 일일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도 요즘처럼 미리 만들어 놓는 것도 아니였고 [[군만두]]도 직접 빚어서 만들었다. 약 2015년부터 짜장면, 짬뽕, 탕수육을 넘어서 [[양꼬치]]나 [[마라탕]], [[우육면]]이 유행하고, [[중화권]] 본토 요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약간의 현지화를 거친 [[중국]]이나 [[대만]] 본토 요리를 제공하는 식당이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매운맛 중심의 사천 요리를 중심으로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