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인관계 (문단 편집) === 중세 === 오호십육국 시대 들어서 중국에서 불교가 크게 유행하면서 이후 법현, [[현장]] 같은 중국 승려들이 인도를 여행하고 기행문을 남긴 바 있다. 중국에서 불교가 번성하면서 교류가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는데, [[당나라]] 시절에는 [[장안]]에 힌두교 사원 및 인도인들이 거주하는 구역이 따로 존재했다. 인도아대륙에 이슬람 왕조들이 들어서면서 중국 불교계와 인도 불교계 사이의 교류는 대폭 축소되었으나, 인도와 중국 사이의 무역은 송나라 시대에도 상당한 규모로 진행되었다. > 신종 희녕(熙寧) 연간(1068~1077)에 대식에서 온 자가 [[시박사|번장사(蕃長司)]]의 업무를 통할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광저우|광주]]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 도번수보순랑장(都蕃首保順郞將) 포타파리자(蒲陀婆離慈)가 아들인 마물(麻勿)로 하여금 공물을 바치며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직위를 대신하게 해 달라고 하고 또 장군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마물을 낭장으로 삼았다. ... 대식의 각 부족은 각각 이름이 달라서, 물순(勿巡),[* [[오만]] 동북부에 위치한 알 핫드 서안의 수르 항 인근을 가리킨다.] [[타브리즈]](阤婆離), 유로화지(俞盧和地),[*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서안의 알 카티프] [[말라바르]](麻囉跋) 등의 나라가 있지만, 모두 대식이란 이름으로 대표되었다. >---- > - 『[[송사]]』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20_0490_0050_0140#self|번역출처]] 해당 사료에서 언급되는 [[말라바르]]는 오늘날 남인도 해안지대 [[케랄라]] 주의 이명이다. 즉 중국인들은 이들을 별개의 인도인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슬림으로 인식하였고, 인도에서 온 무슬림 상인들을 따로 불교용어 대로 [[천축국]]에 왔다고 기록하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