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일관계 (문단 편집) === 청일관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청일관계)] 근세의 [[에도 막부]]와 [[청나라]]는 [[소]] [[닭]]보는 관계였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청에게 굴복했을 때, 청은 일본도 입조시키라는 명령을 조선에 하달했지만 --무슨 쿠빌라이냐-- 이후 명나라 병탄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흐지부지된듯. 초기에만 해도 [[대만]] [[정성공]]의 사례에서 추측되듯 대만이나 [[동남아]]에서는 민간적 교류나 공생이 어느 정도 있었으나 [[쇄국정책]]을 통해 그나마도 차단되었다. [[동남아]]가 [[서구권]] 세력의 식민지가 되었고, [[류큐 왕국]]은 [[청나라]]와 [[에도 막부]]의 양국의 조공국으로 존재했다.[* 이 때문에 17세기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을 중개하는 무역으로 여러가지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18세기에 청나라와 일본의 직교역이 개통되면서 조선의 중개 무역 또한 쇠락한다.] 중국과 일본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은 1871년 청일수호조규였다. 이전까지 양국 간에는 사무역이 있었을 뿐, 놀랍게도 국가간 정식 관계는 전무했으므로, 일본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맹주라 여겨지는 청나라와 대등한 근대 조약을 맺음으로써 국내에서의 [[메이지 유신|급격한 근대화]]에 대한 반발을 돌릴 수 있으리라 계산한 것이다. 반면 청나라 입장에서는 서두를 게 없는 상황이었고, 체급도 맞지 않는 같은 아시아 국가가 전통적인 조공책봉관계가 아닌 근대적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에 대해 조정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이홍장]]은 일본의 수교 제의를 거절해봤자 원한만 살 것이라고 판단하여, 일본 측 전권대사인 다테 무네나리와 협상하여 톈진에서 수호조규를 맺었다.[* 그래도 이홍장은 협상에서 굉장히 선방하였으며, 일본 측의 숨은 의도들을 조기에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 천황과 청나라 황제를 조약의 주체로 하자거나 최혜국 대우를 해달라는 일본의 제의들을 딱 잘라 거절하였으며, '방토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넣어 조공국인 조선에 대한 방어 의식도 드러냈다.] 청나라와 일본이 근대 조약으로 공식 관계를 수립한 것은, 아시아 국가 중 일본만을 예외로 조공책봉관계로 다루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일본의 대외적 위신을 확립시켜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서로 타국으로부터 불공정한 일을 당하면 도움으로써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 조항이 무색하게[* 이홍장이 강하게 주장하여 넣었는데, 이 계산은 맞아떨어져 서방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서양 열강에 대한 방위적 성격의 '군사동맹'이 성립된 것이 아니냐는 경계를 하기도 했다.] 일본은 몇년 안 되어 대만과 류큐 등지에서 청나라와 충돌하였으며, 1884년에는 조선에서 [[갑신정변|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갔다. 그리고 1894년에 [[청일전쟁]]으로 양국의 근대화 성과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자, 전통적인 중국-일본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하다. 특히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완전한 열강 반열에 들어서자, 중국 내에서는 일본을 개화의 모델로 보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일찍 맞이한 일본의 문화적 영향력은, 수많은 [[일본식 한자어]]가 현대 중국어에 수입되는 결과로 나타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