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종(당) (문단 편집) === 폐위와 복위 === 폐위된 이후 방주(房州)로 귀양을 가고[* 때문에 당중종을 '''방주룡'''(房州龍) 또는 '''방릉'''(房陵)이라고도 일컫는데 [[용]]은 천자의 상징이고, 방릉은 방주의 구칭(舊稱)이다. 즉, '''방주에 거하시는 천자'''라는 뜻이었다.[[http://thesaurus.itkc.or.kr/search/view?dataId=4630&sType=_detail&q=&secType=uf&&fq=cateType2_fct%3A%EC%9D%B8%EB%AA%85%2F%EC%99%95%EC%8B%A4%2F%EA%B5%AD%EC%99%95&fq=catePeriod1_fct%3A%EC%A4%91%EA%B5%AD&fq=catePeriod2_fct%3A%EC%A4%91%EA%B5%AD%2F%EB%8B%B9|#]]] 곧 어머니 측천무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무주(당나라)|무주]]혁명''') "중종 복위"를 내세우는 [[반란]]이 빗발쳤다. 중종은 이제 어머니에게 [[독살]]될까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이러면서 차츰 아내 위황후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제2의 어머니'가 생긴 셈이었다. 698년 다시 측천무후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중종은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라고 두려워하여 [[스턴]]되었다.[* 이전부터 측천무후가 이따금 보낸 위로 사신이 오면 항상 그랬다고 한다.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위황후가 "좋은 때도 있고 나쁜 때도 있는 법"이라며 만류했고, 이에 중종이 더욱 위황후에게 의지하게 되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이런 중종을 부축하여 [[뤄양시|낙양]]까지 오게 한 것도 위황후였다. 이것은 측천무후가 갑자기 [[모성애]]나 미안한 감정이 들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측천무후도 중종의 자질을 보고는 황태자로 삼고 싶지 않았는데 [[무승사]]나 [[무삼사]] 같은 친족을 태자로 책봉하려고 말만 꺼냈다가[* 사실 무승사나 무삼사가 먼저 말을 꺼낸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남조 진나라의 고조 무황제 [[진패선]]의 예시가 엄연히 있는데 측천무후가 그럴리가 없다. 무엇보다 바보같은 아들이 개소리를 지껄이는걸 보다 못해 폐위시킨 사람이 본인이었으니 더 꺼려졌을 것이다.] 신하들의 반대에 의해 '''타협점으로 중종을 고른 것이었다.''' 여하간 705년 측천무후가 쇠약해지면서 재상 [[장간지]]의 반정('''[[신룡정변]]''')으로 양위를 받고 다시 제위에 오르는데 드디어 이씨의 황권을 세울 기회가 온 것이었다. 참고로 이현이 제위에 오른 건 정월의 일이지만 당나라 국호를 회복한 건 2월의 일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현은 당나라의 황제가 아닌 무주의 황제로 지냈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