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화민국/군벌 (문단 편집) === 청 멸망, 중화민국 건국 후 ===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몰락한 이후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세워졌으나, 중화민국 자체가 [[북양군벌]]과 공화세력의 타협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청나라 북양군이나 신군의 지휘관들은 주둔지에서 행정공백을 이용하여 봉건영주처럼 행세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중국은 고대의 [[춘추전국시대]]가 20세기에 재현되었다고 할 정도로 각지에 수많은 군벌이 난립하고 있었다.[* [[펄 벅]]의 [[대지]] 2부 아들들에서 이 모습이 생생히 묘사된다.] 이 군벌들은 청나라에서 군에 있던 자들, 마적단의 두목, 혹은 마적에 대항하기 위해 만든 자경단의 리더 등 출신도 다양했으며, 특정 군벌이 어떤 영역을 지배한다 해도 그 안에는 수많은 소군벌들이 그 군벌의 아래에 속해 있는 봉건적인 구조였기 때문에 내부적으로도 무수한 분쟁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체계적인 현대적 군사교육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군벌 간의 대립에서 중요한 것은 [[전략]]이나 [[전술]], 병기, 심지어 명분조차 아니었고 그저 '''돈'''이었다.[* 따라서 군벌들은 나름대로 경제력 확보를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아편을 재배해 정제 모르핀 등의 의료품이나 마약으로 팔거나 콩 등의 수출 작물을 권장해 군자금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았다(21세기에도 군벌들은 마약이나 광물자원뿐 아니라 농작물 수출로도 수익을 올린다.). [[옌시산]]이나 [[장쭤린]]등의 군벌은 자기 통치 구역에서 공업 등의 합법적인 산업을 육성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군벌은 모두 [[모병제]]였는데, 정치적 혼란기의 중국에는 일자리가 없는 남자들이 넘쳐났고 돈이 많을수록 이들을 모병하기도 쉬웠다. 전술적으로 모두 미흡했기 때문에 더 많은 보병이 곧 승리를 보장했던 것이다. 또한 돈을 더 많이 쓰는 군벌이 각 지역의 소군벌을 더 많이 포섭할 수 있었고 이렇게 배신을 유도하는 정치공작이 실제 전술적인 능력보다 더 크게 승리에 기여했다. [[5.4 운동]] 이후 다수의 유럽과 북미 국가들이 중화민국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기에 사실 별다른 대안도 없었다. [[소련]]이나 [[일본 제국]] 등은 이 합의를 자주 위반했고,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체코슬로바키아]] 등은 합의에 동참하지 않았기에 이 나라들을 통할 수는 있었다.[* 대중 무기 금수는 장제스가 난징에 통일 정부를 세운 이후에야 해제된다.] 그러나 대군벌들은 수중에 자체적인 병공창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후베이성에 위치한 [[우페이푸]]의 한양 병공창에서는 한달에 소총 6천정, 기병총 1,500정, 마우저 자동권총 3천정, 탄약 3백만발, 수랭식 중기관총 50정, 50kg 항공폭탄 40발, 박격포, 연막탄, 유탄발사기 등의 생산 능력이 있었다. 산서군벌 소유었던 산시성의 타이위안 병공창은 연간 생산량이 각종 야포 420문, 박격포 1,200문, 소총 3만 6천정, 톰슨 기관단총 1만정, 탄약 5000만발에 달했다. [[봉천군벌]] 소유였던 동3성 병공창의 경우 가장 거대했는데, 연간 생산량은 구경 100mm 이상 대구경 야포 150문, 75mm 이하 경포 1천문, 포탄 20만발, 소총 6만정, 탄약 1억 8,000만발, 기관총 1천정에 달했다. 대조적으로 북벌군의 수중에 있던 유일한 병공창인 [[광저우]] 병공창의 월간 생산량은 소총 750정, 탄약 70만발, 빅커스 중기관총 8정에 불과했다. 1910 ~ 20년대까지 최전성기를 누렸던 중국의 군벌은 [[쑨원]]이 [[1차 국공합작]]에 성공해 [[국민혁명군]]을 구성하고, 그 뒤 [[장제스]]의 [[국민혁명]]으로 1928년 일단 '''공식적으로는'''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군벌의 실력자였던 이들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그래서 북벌이 끝난 후에 '''국가 간 전면전 규모의 내전'''인 [[반장전쟁]]이 발발한다. 그후에도 위세를 떨쳐서 [[중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벌은 살아남았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이 모두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될 즈음에야 군벌을 완전히 뿌리뽑을 수 있었다. 군벌은 군사력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마치 [[전국시대]] 국가들이 당대 인구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엄청난 양의 병력을 끌어모은 것처럼 군벌들도 대규모 병력을 양성했다.[* 인구수도 그때보다 늘어났지만 군벌이 지배한 영역이 전국시대의 주요 국가의 영역을 능가한 경우가 많았다.] 한 예로 제1차 봉직전쟁 당시 봉천(펑톈)군벌 장쭤린(장작림)은 무려 22만 명을 동원했고, 2년후 제2차 직봉전쟁 당시에는 17만 명, 직예(즈리)군벌은 25만 명을 동원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inese_warlords_1925_with_Korean_caption.jpg|width=100%]]}}} || || 1925년 당시 주요 군벌의 지도 || 지도를 보면 중국의 대부분 지역은 다 군벌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고, 광둥성을 중심으로 한 남쪽의 푸른색만이 국민당과 그 동맹 군벌의 영역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86px-Chinese_civil_war_map_02.jpg|width=100%]]}}}|| || 북벌 이후인 1928~1937년 까지의 난징 10년 시기의 지도 || 파란색이 [[중화민국 국민정부]], 만주가 [[장쉐량]], 광서~광저우에 걸친 세력이 [[리쭝런]], 그외에 [[펑위샹]], [[옌시산]]의 이름이 보인다. [[청일전쟁]] 당시부터 이미 군벌의 조짐이 보였기 때문에 당시 청군은 부대간의 유기적인 협동을 하지 못하고 서로 남 보듯 하다가 [[일본]]에 각개격파당하는 등 추태를 보였다. 청의 멸망 이후로는 군벌들이 서로 나뉘어 아예 다른 나라처럼 각개전투를 했기 때문에 [[중일전쟁]] 당시에도 힘을 모으지 못하고 [[일본군]]에게 패퇴하여 수도인 난징를 비롯한 국토 일부분을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