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화사상 (문단 편집) === 중국 전체의 통합 === 흔히 중화사상을 '오래된 중국의 민족주의' 정도로 이해하고는 하나, 단순하게 볼 것은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 중의 하나는 혈통적으로 다른 공동체들을 많이 흡수하면서 중국이 성장해 나갔기 때문이며,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근간 중의 하나가 '우월하게 세계의 중심에 선 화(華) 문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주족]]인 [[청나라]]의 [[옹정제]] 같은 경우, [[동이]][* [[은나라]] 왕조 시절 그 지배권 동부에 해당하는 [[산둥 반도]] 부근. 한반도나 일본도 취급 자체는 동이라고 할 수 있으나,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지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출신의 순 임금과, [[서융]] 출신의 주문왕[* 그런데 주나라 같은 경우는 서융을 가리켜 도의를 지키지 않는 오랑캐라 욕하고 진나라 왕을 책봉하면서 서융을 정복하라고 했기 때문에 출처에 의문이 있다.]을 거론하며, 이들도 [[한족]] 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음을 《대의각미록》에서 주장하여 [[청나라]]의 정당성을 삼는 근거로 내세웠다. [[한족]] 항목에서 볼 수 있듯, 실제로 남중국과 북중국은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제법 큰 차이가 있음에도, 역대 중국의 국가들은 '중화'의 범위로 이들을 묶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는 만주족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면이 강한 주장으로, 정작 한족 신사[* 紳士: 지방 유지, 명문가.] 계층이 청 황실을 오랑캐라고 보는 관점은 청 말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이들 한족 신사층은 지방에 웅거하면서도, '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을 멸절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킨다)'을 표방하며 언젠가 '오랑캐의 지배'를 뒤엎을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고, 그것이 대대적으로 폭발한 것이 이른바 [[태평천국의 난]]이다[* 다만 청조에 적극 협력하여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앞장선 것도 한족 신사층이다.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등이 대표적. 이들은 점차 군권을 쥐던 [[팔기군|만주팔기]]를 대체하여 [[중화민국]] 초기 [[군벌/중화민국|군벌]]로 성장한다.]. 이는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다고 인식하고 있다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이념이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근대적 민족구분이 없던 상태의 근대 중국에 민족주의가 유입되면서 이런 인식도 생겨났다. 아무튼 청나라가 안정된 뒤에도 한족에 대한 강경책과 탄압이 완전히 사그라진 건 아니었다. [[문자의 옥]] 항목 참조. 다만 당시의 민족 탄압은 근대적 민족주의가 적용된 형태는 아니었고 민족간의 경계도 애매했다고 한다. 중화주의가 민족주의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보통 태평천국의 난 전후로 본다. 현대에도 중화사상은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고 있다. 우선 종족 혁명론에 근거해서 반청복명을 주장하던 한족들이 자신들이 권력을 잡고나자 중화민족 개념을 급조해서 한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걸 정당화했다는 점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민족 왕조의 경우는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잘한 점은 덜 인정받고 한족 왕조와 똑같은 병크를 저질러도 더 까이는 성향은 컸지만, 하여튼 청나라 말기의 혁명파들은 청나라의 지배기간을 한족이 식민지배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며, [[신해혁명]]은 한족의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근대적 민족주의를 이렇게 해석한 것이다. '''현대 중국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기 위해 정 반대의 주장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 서구의 개념인 민족과 식민지에 대해 당시 중국에서는 여러 해석이 나왔는데, 특히 중화라는 개념이 근대적 민족주의로 따지면 어디까지의 범위인가 하는 것이다. 반청복명의 혁명파들의 주장은 장빙린의 종족 혁명론에 근거한 해석이었다. 종족 혁명론은 한족만이 중화로 여겨질 수 있기에 수준 낮은 이민족을 배척해야 한다는 관점인데, 그래도 장빙린은 '한족과 만주, 몽골, 티벳, 위구르가 모두 별개의 나라가 되어야 하므로 한족이 새 나라를 세우고 나면 다른 민족들도 알아서 독립해서 나라를 세우라'는 나름 공평하고 쿨한 태도였다. 다만 이후 중화주의와 한족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다른 세력의 주장에 밀려 오족공화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반면에 개혁파들은 청 왕조도 중화에 포함할 수 있다면서 혁명파의 이 주장을 반박했다. [[삼합회]](三合會)의 시초가 되었다는 말도 있는 홍문(洪門)은 명나라 말기~청나라 초기에 일어난 비밀결사(秘密結社)로, "반청복명"(反清復明, 청을 몰아내고 명을 부활시킨다)를 모토로 삼는다. 이후 홍문은 모든 산당(山堂)과 반청조직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 되었다.[* 여기서 주로 수련시킨 무술이 홍가권(洪家拳)으로 발전해 나아갔다고 하며, 무협소설, 무협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멸만흥한' 이념이나 [[조선]] 및 [[베트남]] 등에서 내세운 [[소중화]] 사상은, 오랑캐로 일컬어지는 외래인 중심의 지배를 부정하는 기조에서 성립된 것으로, 뿌리 깊은 중화사상 하에서 정통 중화인이 아닌 오랑캐를 질서의 정점에 세우는 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만 현대의 중국은 자국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무조건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조상들이 이민족을 거부했다는 것을 묻으면서까지 '중국은 처음부터 다민족국가였다' 라고 하는 방향으로 역사관을 굳히는 중이고 동북공정도 이 과정의 하나. 근대에는 혁명파와 개혁파의 해석이 충돌하긴 했지만 결국 이러저러 하다가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공화국 중국은 한족 중심의 체제일 수밖에 없는 형태로 출발한다. 그런데 문제는 혁명파 이론을 지지하던 한족들도 정작 시대가 바뀌고 나자 다른 민족들의 독립운동은 탄압하는 이중잣대를 보인다. 위구르와 몽골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중국 군벌과의 투쟁이 계속되었고, 이 부분은 근대 중국의 제국주의적인 면모이지만 그냥 그 부분은 축소되고 군벌시대의 흥미진진한 통일 과정 정도로 여겨진다. 하여튼 여기에서 현대의 소수민족 문제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중화인'들이 중화사상을 정당화하는 이유는 중화 문화였지만, 그 기저에는 혈통이나 인적 공동체의 의미가 깔려 있었다. 특히 근대에 와서 더 이런 성향이 굳어진다. 그러나 '''고대 이래 황하 인근 집단이 주변의 이민족을 흡수하며, 지금의 [[한족]]으로 세를 불려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화'의 범위는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중심 지역에서 인구가 팽창하는 범위 이상으로 이루어진 문화의 확장을 동반한 것이었고, '중화인'의 혈통적, 인적인 구성도 중화사상의 주장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유동하면서 넓어져 갔다. 시대가 지나면서 중국의 영토가 계속해서 확장된 것 또한 이렇게 당연하게 자신을 '중화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전국시대]]에 중국의 일원으로 취급받게 된 [[연(춘추전국시대)|연(燕)]], [[초(춘추전국시대)|초(楚)]], [[오(춘추시대)|오(吳)]], [[월나라|월(越)]], [[진(영성)|진(秦)]] 등의 공동체는 본래 전혀 다른 정체성을 지닌 '다른 세계'였다는 사실이 상주 시대 기록의 분석을 통해 드러나고 있으나, '''역사의 방향성은 이 모두가 '중국'에 편입되는 쪽으로 흘러갔다'''.[* 연나라는 주나라의 전진 멀티로서, 주나라의 문화를 이 지역에 전파하는 선봉이었고, 초, 오, 월은 주나라와는 다른 정체성을 주장하면서도, 주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중국으로 편입됐다. 진나라는 전자인지 후자인지 좀 논란이 있는 편.] [[오호십육국시대]] 중국에 진입했던 수많은 이민족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의 정복왕조 역시도 막상 유목민 시절을 벗어나 정주민이 되면서부터는, 중국의 압도적인 문화와 인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 중화사상에 물들어 이 질서 안으로 편입되었다. 물론 이러한 이민족들이 중국에 미친 영향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중화사상과 민족의 팽창이 단지 문화와 인구를 앞세운 평화적 과정이라는 통념은 중화주의적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다. 한족들에 의한 원주민 대량 학살과 식민화가 정석적인 수법이었고 삼국지 같은 고서만 봐도 의도적으로 이민족을 사냥하고 흡수해서 동화시키는 행위가 숱하게 존재했다. 그 많은 비한족 원주민 노예들은 다 어디서 왔겠는가? 이민족 문화가 흡수되어 중국문화가 형성된 경우로는 [[청나라]] 시절에, 중국인 전통의 상투가 사라지고 [[변발]]로 문화적 습속이 바뀌었으며, 이후 현대화를 거침에 따라 상투는 다시 부활하지 못했다. 문화란 일방적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물들이는 게 아니다. 이처럼 '''중화사상의 막대한 힘이 동아시아에 작용한 결과, 근대 이전까지의 2,000년간 중국이 방대한 면적과 수많은 인구를 하나의 틀 안에 묶고, 이를 [[제국]]의 형태로 실현할 수 있었던 중요한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수 있었다'''. 또한 지금까지도 중국이 그 거대한 세력을 유지 가능하면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꾸준히 정치적-통치적 폐쇄성을 띄는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중화사상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말이 된다. [[한국 신화]]가 한국의 세계관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 것도, 개별적인 정체성보다 중화사상에 근거한 세계 체제를 지향했던 중화 문화권의 과거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본래 반청복명,멸만흥한을 외치던 한족들이 갑자기 '하나의 중국'을 외치게 된 이유는 결국 정치적 이유가 90퍼센트인데, 막상 만주족의 지배를 뒤엎으며 독립하고 나니 마찬가지로 만주족의 지배를 받던 티벳,위구르,외몽골의 영토가 탐이 나서다. 만주족 왕조 청나라, 즉 '만청'을 부정하면 그 만청이 두배로 넓힌 광대한 영토를 다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것. 그래서 갑자기 '56개 민족의 연합체'라는 사상이 강조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청나라가 무너진 후에 티벳도 독립했는데, 50년대에 마오쩌뚱이 티벳을 강제병합 한 이후로 중공은 지금까지 쭉 '역사적으로 티벳도 중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청나라) 강제병합이 아니며 티벳 독립운동도 반란분자들에 불과하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