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즉결처분 (문단 편집) == 전시 상황에서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dimg.tagstory.com/1457.jpg|width=100%]]}}}|| || [[테트 공세]] 중 촬영된 [[사이공]]식 처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베트콩]] 즉결처형 사진[* [[남베트남]] 수도경찰청장 응우옌 응옥 로안 장군이 한 베트콩을 즉결처분하는 광경이다. 즉결처분 당한 베트콩은 응우옌 반 렘이라는 자이며 암살과 보복을 담당하는 베트콩 소대의 지휘자로 당시 베트남 장교들을 비롯해 부인과 어린 아이까지 살해한 자였고 자기가 학살한 부녀자들 시체 바로 옆에서 체포당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실제로는 신원도, 혐의도 확인된 바 없다. 이 사진으로 인해 응우옌 응옥 로안은 남베트남 멸망 후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호주로 이송되었을 때 의료진들이 그의 치료를 거부한 데다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도 의회에서 그를 전쟁 범죄자로 규정하고 추방을 지속적으로 논의할 정도로 악랄한 살인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살았다. 훗날 반 렘은 죽을 만한 인물이었음이 밝혀졌고 미 의회는 추가 조사 끝에 그에게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에디 애덤스 역시 오히려 이 사진을 찍은 것을 후회하면서 응옥 로안과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친한 친구로 지냈다고 한다.] || 크게 적군 [[포로]]를 처형하는 경우와 잘못을 저지른 아군을 처형하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앞의 경우는 [[포로 학살]] 문서 참조. 후자의 경우 고대부터 전시 규율 유지를 위해 행해졌다. [[로마]] 이후 현대까지 전쟁터의 지휘관은 물러서는 병사를 즉결처형할 권한이 주어졌다. 특히 냉병기 시대라면 전우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치면 병사들이 동요하고 전열이 무너지며 '''후퇴 때보다 더 많은 사상자들을 내기 때문'''이다.[* 후퇴와 패주/공황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엄연히 전술이고 심지어 제대로 구사하려면 굉장한 수준의 통솔력과 훈련이 필요하지만 공황은 아니다.] 그 밖에도 규율 유지를 위해 병사들을 처형하는 일이 많이 행해졌는데 일례로 오왕 합려가 [[손무]]의 용병술을 시험하고자 궁녀 180명을 내주며 훈련시키도록 하자 손무는 합려가 가장 아끼는 궁녀 둘을 대장으로 세워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궁녀들은 훈련에 따르지 않고 장난처럼 여겼다. 그러자 손무는 군령을 세우기 위해 궁녀 둘을 처형하도록 하였고, 합려가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손무는 군령은 왕명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며 사형을 집행하였다. 그리고 다시 다음가는 궁녀를 뽑아 대장으로 삼고 훈련을 시키자 모든 궁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전열보병]] 시대도 이것이 많이 이용된 시기 중 하나다. 좌우의 전우가 죽어나가도 병사가 전열을 이탈하지 않는 것이 전열보병 운용의 전제이자 핵심이었기 때문에 지휘관의 허가 없는 전열 이탈은 매우 중죄로 다스려졌다.[* 전쟁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대단히 혼잡하고 쌍방이 흥분된 상황인데 전근대에는 그런 상황을 고작 북과 나팔 그리고 깃발만으로 통제해야 했다. 그만큼 대열이 한번 무너지면 병력 숫자 따위는 쓸모가 없어졌다. 대표적인 전투가 백만의 군사를 겨우 8만으로 이긴 [[비수대전]].] 이런 일을 전담하는 부대를 [[독전대]]라고 하며 20세기 [[6.25 전쟁]] 때까지 남아 있었다. 물론 즉결처분이라고 해서 무조건 죽이는 건 아니고 상급 지휘관의 허가가 필요한 사항에 대해 하급 지휘관이 선처리 후보고 식으로도 이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