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증산도 (문단 편집) === 해방 후 [[증산교 대법사]]의 성립과 안세찬의 등장 === 보천교 고위 간부였던 이상호는 자금 및 일제와의 관계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1924년 차경석에게 파문당했다. 이후 1928년, 전북 김제에서 동화교(東華敎)라는 종교단체를 세웠다. 1931년에는 김제에 있던 고판례를 끌어들여 증산계 종교 중에서는 나름 세력이 커졌다. 1936년 차경석이 죽은 후 일제의 유사종교해체령에 따라 보천교 및 기타 종교들이 해산당할 때 동화교 역시 해산당했다.[* 이때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무극도 또한 함께 해산됐다.] 광복을 맞은 1945년, 이상호는 최위석, 자기 동생인 이정립 등과 함께 서울에서 대법사(大法社)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다시 종교조직을 세웠다. 1947년에는 중요인물이었던 최위석과 갈라져 교단명을 '[[증산교 대법사|증산교]]'라고 하였다. 증산도에서는 당시 안세찬이 증산교의 실질적 대표로 활약했다고 주장한다. 보천교에 몸담았었고 증산천사공사기, 대순전경을 집필해 범증산교단에서 이름이 높았던 이상호에 비해 안세찬은 나이도 경력도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1. 20대 중반에 불과하던 그가 증산교의 목화토금수 5主 중 水主 직책을 맡았다는 점, 2. 아산 등지에서 상당한 포교 실적을 올렸다는 점, 3. 당시 이상호는 시력을 거의 잃어 지도자로서 제대로 행세하기 어려웠다는 점 등을 볼 때 어느 정도 진실이 섞인 과장으로 추측되며, 적어도 안세찬 본인은 자신이 증산교의 대표였다고 믿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때 증산교의 입교서류에 안세찬이 총사수總師首로 기재되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전쟁 당시 증산교의 교명은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였다.] 안세찬은 "의통인패를 만들자. 청음(이상호의 호)이 만드는데 우리도 못 만들 이유가 없다." 하며 독자적으로 의통인패를 제작했다. 그런데 증산교 본부에서는 의통인패를 병겁에 대비한 신물이라 하여 교주인 이상호만 만들던 상황이었다. 안세찬이 독자적으로 이를 만들자 교단 본부측에서는 크게 놀라 안세찬을 경계하였다. 그 뒤 안세찬은 의통구호단의 조직국장을 맡으면서 호신호부(護身護符)와 인물 배치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구성하여 다시 한번 다른 간부들과 크게 다투었고 1951년, 증산교로부터 출교처분을 받았다. 증산교는 안세찬이 떠난 이후인 1967년에 '증산교 본부'라는 현재의 교명을 확정했다. 이후 안세찬은 옷감을 만들거나 대전에서 한의원을 하면서 1975년까지 종교와 크게 관계 없이 살았다. 현재 증산도 교단은 이 또한 강일순이 '도수'로 안배한 바라고 주장하며 '20년 대휴게기'라고 부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