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눌 (문단 편집) == 생애 == 동주(洞州)[* 현재의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고려 성균관|국학]]의 학정을 지낸 정광우(鄭光遇)이다. [[의종(고려)|의종]] 19년(1165년)에 출가하여 [[종휘]]의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명종(고려)|명종]] 12년(1182년)에 승과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포기하고 [[개경]] 보제사의 담선법회에 참여했다. [[창평]] 청원사에서 6조 혜능의 《단경》을 읽고 대각한 뒤에도 수도에 더욱 정진했다. 명종 15년(1185년)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독하고 선교종을 통합해야 할 필요성을 깨우쳤다. 명종 18년(1188년), 공산[* 현재의 [[대구시]] [[팔공산]]]의 [[거조사]][*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군]]에 있으며 [[신라]] 시대에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경내의 [[영천 거조사 영산전|영산전]]은 [[우왕]] 1년(1375년)에 세워졌는데 국내에 딱 4개 남은 고려시대 목조 [[건축]]으로 유명하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소속 [[은해사]]의 말사로 거조암(庵)이라고도 불린다.[[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3925|#]] ]에 머물면서 세속화되어 가던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정혜결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으며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하였다. 이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3년 동안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해 적극적 보살행의 현실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신종(고려)|신종]] 3년(1200년), 송광산 길상사(현재의 [[송광사]])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해 깨달음 이후 남아있는 무명을 수행으로 사그라뜨리자는 [[돈오점수]](頓悟漸修)[* 단박에 깨달아서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것. 현대 한국의 승려 [[성철(승려)|성철]]은 '깨달음 뒤에도 수행이 필요하다면 그게 어떻게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논리로 지눌을 비판했다.([[돈오돈수]]) 지눌은 돈오점수라는 수행방식을 갓난아이로 비유해 설명했다. [[인간]]은 태어남으로써 이미 [[생명]]을 얻었지만, 단순히 태어남만으로 끝내지 않고 [[부모]]가 기르고 자신이 먹고 자고 배우며 [[성장]]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찬가지로 깨달았다고 해서 수행을 그만둘 수는 없다는 논리.]와 이론학습과 참선을 함께 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를 주장하고 "선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로써 용(用)을 삼아야 한다." 하고 말해 선종과 교종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지눌의 사상에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 말에는 선종 중심의 뜻이 드러난다는 주장도 있다. '말씀'과 '마음'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본질에 가까울지는 예상이 가능하지 않은가.]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송광사 전 보조국사 가사 국립중앙박물관1 수정2.jpg|width=100%]]}}}|| || [[희종(고려)|희종]]이 하사한 가사[* 1951년 6.25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가로 약 105cm이고 세로 약 280cm이다.] || [[희종(고려)|희종]]은 즉위하자 송광산을 [[조계산]], 길상사를 수선사(현 송광사)라 고쳐 제방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를 내렸다. 이에 대해서는 이 시기 [[무신정권]]이 기존의 [[귀족]] 중심 교종[* 교종 중에 [[법상종]]은 [[문벌귀족]]들이 신봉했던 종파이다. 때문에 왕들은 천태종을 중심으로 법상종을 통합하려 했고 무신정권은 선종을 중심으로 법상종과 천태종을 포함한 교종까지 통합하려 시도했다.]을 밀어내고 선종 위주의 조계종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는 해석도 많다. 이후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해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입적하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라 하고 국사에 추증하였다. 지눌의 뒤는 [[유불일치설]]로 유명한 [[혜심]]이 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