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지증왕 (문단 편집) == 상세 == 늦게 왕위에 올랐지만 14년을 재위하고 승하한 나이가 77세로 당시로는 장수했고 지금 기준으로도 천수를 누린 나이로 볼 수 있다. 이름인 '지철로'(智哲老)에서 [[한자]] 哲의 원음은 /tiet/에 가까워 "톗"에 가까운 발음이었고, 종성 ㄷ과 ㄹ의 전호 현상을 감안하면 '지대로'(智大路)와 큰 차이가 없다. 신라의 관직인 '대등'을 《[[속일본기]]》에서는 '마카리타로'(萬加利陁魯)라는 훈을 써 놓은 점을 감안하면 '등'의 당시 음이 '타로'에 대응하는 것을 보여주며 이에 '등'(證)이라고 쓰고 "드르"에 가깝게 읽었을 것으로 보인다. [[내물 마립간]]의 [[후손]]인데 이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에 다른 점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내물 마립간의 증손자이자 습보(習寶) [[갈문왕]][* [[김복호|복호]]의 아들]의 아들, 《삼국유사》에서는 [[눌지 마립간]]의 동생 기보(期寶)[* 일반적으로 사보(斯寶)의 오기로 본다.] 갈문왕의 아들로 나온다. 지증왕의 어머니는 눌지 마립간의 딸 조생부인(鳥生夫人)인데 오생부인(烏生夫人)이라고도 한다. 맨 앞의 한자만 다른데 비슷하게 생겨서 헷갈리기 쉽다. 한 획이 있냐 없냐의 차이기 때문. 기보 갈문왕은 [[소지 마립간]]의 [[장인어른|장인]]이기도 하다. 지증왕은 부계만 봤을 때 《삼국사기》에서는 소지 마립간의 6촌, 《삼국유사》에서는 소지 마립간의 5촌이며 [[처남]]이 된다. 지증왕이 내물 마립간의 증손자인지 손자인지에 대해서는 보통 《삼국사기》 기록이 옳다고 보며, 보통 기보 갈문왕과 습보 갈문왕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문제는 소지 마립간의 장인과 관련된 기록인데 이건 보통 《삼국사기》 내용 기준으로 보기에 습보 갈문왕이 소지 마립간의 장인이라고는 설명하지 않는 편이다. 일단 [[역사학]]계에서는 기보 갈문왕과 선혜부인의 아버지 내숙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낮게 본다. 《삼국유사》 내용이 틀렸다고 보거나 소지 마립간이 [[왕비]]를 두 번 맞이했다고 보는 편. 다만 후자의 경우 벽화부인까지 합쳐 소지 마립간의 왕비가 3명이나 되어버리는 문제가 생겨서 일반적으로는 내숙/잉숙의 딸이라고 서술한 《삼국사기》의 내용을 정설로 본다. 어찌 되었든 [[눌지 마립간]]의 직계가 끊긴 이후, 왕위에 오르는데 이미 눌지 마립간 이후 왕들이 복호와 미사흔의 딸과 손녀를 왕비로 맞아들인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지증왕 역시 이미 왕비족의 일원으로 어느 정도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결국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소지 마립간의 사후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소지 마립간의 경우 최후가 불분명하고[* 승하하기 두 달 전인 500년 9월에 벽화를 경주 왕궁으로 불러들였고, 결국 그녀는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두 달만인 500년 11월 어떤 전조도 없이 갑작스레 승하하는데 이는 꽤 부자연스러운 부분이다.] 지증왕이 상당히 연로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점을 감안한다면 아래의 <연제부인 설화>나 이후 박씨들이 왕비족으로 꽤나 많이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즉위는 박씨 가문의 영향력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종합해보자면 지속적으로 미사흔계에게 왕비 배출 가문이 밀리고 있던 복호계의 수장으로 박씨 가문과 손 잡고 신라 왕위를 차지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아들이 없었던 소지 마립간에게 아들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 500년 소지 마립간이 후궁으로 맞이한 벽화부인은 실제로 아들을 출산했다.]이었기에 여러모로 급박하게 일을 치렀을 가능성이 있다. 재위 도중에 신라 임금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었기에 보통은 지증왕이라고 하지만 간혹 지증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왕비인 [[연제부인]]과의 사이에서 [[법흥왕]]과 [[김입종]] 등을 두었고, 1814년에 건립한 경순왕전비에 나오는 원성왕의 직계 선조인 김진종[* 연제부인의 소생인지는 확실치 않다.] 또한 이 지증왕의 아들이기에 지증왕 이후의 모든 신라 임금들은 그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원성왕은 흔히 나물 마립간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원성왕이 본인과는 달리 지증왕의 직계 후예는 아닌 나물 마립간의 후예였던 선덕왕을 '동생'으로서 잇는다는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울 선덕왕, 원성왕, 무열왕계의 공통조상이 나물 마립간이었던 데 있다. 원성왕 자체는 실제로는 지증왕의 직계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 즉위했을 당시 고령이라서 [[업적]] 중 상당수도 지증왕 대신 젊은 아들 법흥왕이 [[태자]]로서 [[권력]]을 가지고 미리 진행했을 가능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