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시황릉 (문단 편집) == 진시황본기의 기록 == [[사마천]]의 [[사기(역사책)|사기]] 진시황본기에 기록된 진시황릉 관련 서술이다. ||9월, 시황제를 여산(酈山)에 매장했다. 九月,葬始皇酈山. 시황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에 여산을 공사했고,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죄수 70만여 명에게 지하수가 3번 돌 정도로 구덩이를 깊게 파게 하고 구리를 부어 외곽을 만들었다. 始皇初即位, 穿治酈山, 及并天下, 天下徒送詣七十餘萬人, 穿三泉, 下銅而致槨. 궁궐과 여러 관리[* 바로 병마용을 가리킨다.], 진기한 보물들을 가득 매장하였다. 宮觀百官奇器珍怪徙臧滿之. 장인에게 기계 [[쇠뇌]]를 만들게 하여 (묘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하였다. 令匠作機弩矢, 有所穿近者輒射之. [[수은]]으로 여러 개울,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하였다. 以水銀為百川江河大海, 機相灌輸. 위로는 하늘의 모습을, 아래로는 땅의 형상을 갖추었다. 上具天文, 下具地理. [[인어]](人魚)[* 여기서 말하는 [[인어]]는 당연히 진짜 인어가 아니다. 인어의 정체는 [[듀공]]이란 바다 포유류 동물이다. 이 동물이 종종 뭍으로 올라와서 쉴 때 머리에 해초를 뒤집어 쓰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해질녘에 멀리서 바라보면 꼭 반인반어의 [[소녀]] 모습과 같아서 인어의 모티브가 되었다.]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영구히 꺼지지 않게 하였다. 以人魚膏為燭, 度不滅者久之. [[영호해|이세황제]]가 말하기를 "자식이 없는, 선제의 후궁을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二世曰 "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 명령을 내려 (그들을) [[순장|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皆令從死, 死者甚眾. 매장을 끝내자 누군가 말하기를 "장인이 기계를 만들었고, 모든 노예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노예가 많아 (사실이) 누설될 것입니다." 葬既已下, 或言 "工匠為機, 臧皆知之, 臧重即泄." 장례가 끝나고 (보물 등을) 이미 다 감추어 놓자, [[순장|묘의 가운데 통로를 폐쇄하고 바깥문도 폐쇄하여 장인과 노예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능에) 풀과 나무를 심으니 (그 모습이) 마치 산과 같았다. 大事畢, 已臧, 閉中羨, 下外羨門, 盡閉工匠臧者, 無復出者. 樹草木以象山.||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 진시황릉의 위치 * 진시황릉의 건설기간과 동원된 인부의 수 * 진시황릉의 구조와 매장된 내용물 * [[순장|후궁과 인부 등 수많은 사람들이 생매장을 당했다는 사실]] * 진시황릉의 규모 이에 관한 구체적인 분석은 아래에 서술하였다. 사기의 기록이 비교적 구체적인데, 사마천이 진시황릉 내부를 직접 탐험하여 서술했을 리는 없겠고[* 진시황은 자기 무덤의 위치나 구조가 알려지지 않도록 사람들을 죽였다. 그 때문인지 진나라 멸망 이후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유방은 항우가 지은 죄를 나열하며 진시황릉을 도굴했다고 주장했지만 프로파간다일 확률이 높다. 게다가 전근대 중국에서도 남의 무덤을 함부로 헤집는 것은 매우 질 나쁜 범죄로 여겼는데, 도굴꾼도 아니고 긍지 높은 사대부인 사마천이 진시황릉 내부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 기존 기록을 참고해서 썼을 것이다. [[한고제|유방]]이 [[셴양시|함양]]에 입성하자 [[소하]]가 진나라의 문서들을 수집하고 보관했다는 서술이 사기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 있는데, 그때 수집된 문서들 중 진시황릉에 대한 것도 있어서 사마천이 참고했으리라 추정한다. 사마천이 묘사한 진시황릉의 모습 중에서도 '수은의 강과 바다'를 조성했다는 구절이 유명하다. 상술하듯이 사마천이 직접 무덤 내부를 봤을 리가 없으니 현대 학자들은 이 묘사를 허구적인 표현이나 전승 정도로 추측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사회과학원]]의 분석결과에 따르면 황릉 봉토의 수은 함유량이 인근 지역 흙보다 무려 7배 이상 높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흙을 파낼수록 수은 함유량이 더 가파르게 올랐기 때문에 다소 표현은 과장됐지만 무덤을 조성하며 수은을 다량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황릉 조성에 동원된 죄수나 노예들이 완공 후 몰살됐다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황자나 후궁의 유골로 추정되는 게 발견된 것과 달리 몰살된 노역자들의 대규모 시체가 묘비 속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오히려 장한이 여릉의 노역 중인 죄수들을 징병하여 진승, 오광의 반란 진압에 성공했다는 기록이 나온 것을 보면 위와 마찬가지로 과장, 와전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