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시황릉 (문단 편집) == 기타 == 병마용갱 덕분에 고대 중국의 [[군대]]의 무장이 어떠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중세 군대의 갑옷 착용 비율은 논쟁거리지만, 병마용갱으로 미루어 보건대 고대 중국의 갑옷 착용 비율은 (병력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높았으리라 여긴다. 중국 역사상에서 [[상나라]] 시대부터 [[청나라]] 시대까지 제왕릉들을 비교하면 진시황릉의 능원이 가장 크다고 한다. [[서한]](전한)시대 황릉도 능원에 [[도시]]를 설립하여 유지했을 정도로 거대했으나 진시황릉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고, [[동한]](후한)~수나라 건국까지 제왕릉은 정치ㆍ사회ㆍ경제ㆍ군사적으로 거대하게 짓기가 무리였으나 짓는 경우는 있었다. 허나 신왕조 건국이나 [[도굴]]ㆍ[[전쟁]] 등으로 파괴되는 능묘가 많았다. [[수나라]] 때도 [[수문제|문제 양견]]의 태릉을 제외하면[* 태릉은 부장품이 처음부터 거의 없었다고 한다.] 황릉을 건설하지 않았고, [[수양제|양제]]는 황릉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죽어서 부인과 시종이 묻어주었는데, 크기는 일반 민가 수준이었으나 후대에 3 m 정도 높여 주었다고 한다. 이후 당나라 시대에는 다시 진, 한을 본받아서 초대 황제 [[당고조|고조 이연]]ㆍ[[당소종|소종]]ㆍ[[당애종|애제]] 등 말기 황제를 제외하면 주로 거대한 산을 봉분으로 삼아 내부에 굴을 파서 여러 통로와 함정이 있는 방들을 만들어 부장품을 넣었었다. 가장 넒은 능원은 [[당태종|당태종 이세민]]과 문덕황후 장손씨가 묻힌 구종산 소릉인데, 부장된 황족 관료만 2백 명에 가까울 정도로 크다. 그러나 현재까지 온전한 당나라 황제릉은 [[당고종|고종]]과 [[측천무후]]가 합장된 건릉뿐이고(서쪽반을 파도 안나와서 포기), 다른 능은 당나라 말기에 온도(溫韜)가 모두 도굴하였다. [[송나라]] 시대는 규모는 작지만 한나라 때처럼 평지에 봉분을 올렸다. 건국 후 시간이 흐르면서 능묘는 화려해지고 장례식 때 동원되는 인원도 많아졌다. 요ㆍ서하ㆍ금나라 때도 규모는 한나라ㆍ당나라 때보다는 작으나 화려했다. 원나라 때에는 시조 [[칭기즈 칸]]에서 [[토곤 테무르]]까지 몽골 초원의 풍습대로 봉분이나 석각ㆍ가옥담벽들을 만들지 않았고, 위치도 추정만 할 뿐이다. [[명나라]] 시대는 웅장하고 규모가 크지만 진시황릉이나 서한ㆍ당대 황릉보다는 작았다. 난징에 묻힌 태조를 제외한 나머지 황제들은 수도 베이징 인근에 [[명십삼릉]]이라는 황릉 단지를 조성했는데, 장릉ㆍ정릉ㆍ소릉을 제외하면 능은전(사당)은 터만 남거나 부서진 채로 관리를 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다. 청나라 시대는 [[청동릉]](베이징 동쪽 황실묘지), [[청서릉]](베이징 서쪽 황실묘지), 만주심양황릉군 등에 명나라 시대보다는 작아도 황릉 하나 하나가 지하 자금성이라 할 정도로 조각이 섬세하고 부장품도 많이 넣었다. 그러나 중화민국 초기 도굴장군이라 불리던 [[쑨뎬잉]]이 순치제의 효릉을 제외하고[* 부채와 신발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청동릉 지역을 [[동릉 도굴 사건|모두 도굴]]하였다. (청대황실능침도 자세히 보면 손실된 곳이 많다) 진시황릉과 병마용에 대한 교양서로는 웨난 저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8571|부활하는 군단]]과 장점민 저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882741|제국의 빛과 그늘]]을 추천한다. 한 번은 [[시각장애인]]들이 단체 관람을 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어떻게 병마용의 위대함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특별히 그들에게만 병마용을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꼭 중국뿐이 아니라,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에서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전시품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 있다.] [[파일:external/image.lesvacances.co.kr/2006918173749.jpg]] [[2006년]], [[독일인]] 행위 예술가가 발굴된 토기 병사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병마용에 기어들어가 포즈를 취하는 "예술"을 했다. 이걸 관리 측에서는 눈치를 못 챘다가 나중에 체포하려고 했는데, 너무 분장을 잘 하고 숨어있는 바람에 예술가를 잡는 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유한양행]]의 숙취해소제 '내일엔'의 신문광고에 등장했다. '3천 년 만에 숙취에서 깨어나다!'라고. 병마용이 광고에 등장한 것은 '내일엔'의 원료인 황칠나무가 진시황이 찾아헤매던 '불로초'이기 때문이라는 듯하다. 진시황릉은 현재까지 발굴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으며, 중국 정부 또한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 완전한 발굴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유물을 전부 다 발굴한 뒤 '''그것들을 어찌 할 것이냐'''란 뒷처리와 보존 문제 또한 큰 걸림돌이다. 게다가 사마천의 사기에 진시황릉에는 도굴을 막기 위한 각종 함정들이 설치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무턱대고 파들어갔다가는 자칫하면 인명 피해 발생에 이어 유물까지 손실할 수도 있다. 물론 피라미드의 예를 보면 하도 오래된지라 자연 파손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외에도 수천 년간 밀폐된 공간이 산소와 접촉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내부에 대량의 수은까지 들이부어져 있어 여러모로 들입다 파헤치기엔 문제가 많다.] 하지만 전 세계의 중국사나 아시아 역사학자들은 아직까지 거의 밝혀지지 않은 진나라 시대의 유물들이 온전히 매장되었을 진시황릉 발굴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 형식이 도입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이로 인해, 또한 유럽인 DNA의 흔적도 근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하기에, 그리스인들이 [[http://www.independent.co.uk/news/science/china-terracotta-army-ancient-greek-sculptors-alexander-the-great-marco-polo-a7357606.html|진시황릉을 지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다. 아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때 떨어져나간 일부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라는 설. 하지만 그리스인이 직접 연관된 것이 아니라 인도유럽어족 중 가장 동쪽에 살던 토카리인의 DNA가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으며[* 이들의 후손이 [[위구르인]]이다. 물론 튀르크인들과 섞여서 황인의 형질도 섞였고 언어적으로 튀르크어족에 속하는 [[위구르어]]를 쓰고 있다.], 미술 형식도 간다라 미술이 전파된 식으로 간접적으로 퍼진 것이 도입된 것이란 의견도 있다. 2018년에는 [[미국]] 전시 중이던 병마용에서 어느 미국인 관광객이 손가락을 잘라 훔쳐갔다가 [[FBI]]에 붙잡혔다. [[https://www.google.com/amp/s/m.yna.co.kr/amp/view/MYH20180219001900038|#]] 2020년 1월 24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예방의 일환으로 일시적으로 영업 중단을 한다고 밝혔다. [[https://www.yna.co.kr/view/AKR20200124044751097?input=1179m|#]]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